중동서 파산은 불가능, 현실 모르는 한국稅法…골병드는 건설사

현지법에 갇히고 국내법은 나몰라라…건설사 ‘비명’

2021년 현지서 적자 났는데
사우디, 법인세 514억 ‘폭탄’
韓은 파산 끝나야 비용처리
건설사 “애먼 돈 나간다” 분통

“네옴시티 특수 앞두고 법 손질을”
2010년대 초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 A건설사는 10년째 현지 법인 청산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사우디가 2018년에야 법인 청산을 위한 ‘파산법’을 제정한 데다 실제 사례가 없어 행정절차가 좀처럼 진척되지 않고 있어서다. 당국이 청산 조건으로 내건 법인 납세 증명서를 받아내는 데만 5년이 걸렸다. A건설사 관계자는 “청산을 위한 다음 절차를 밟는 데 최소 수년이 추가 소요될 전망”이라며 “현지 법률 자문사들도 실제 청산에 이를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양국 정부 사이에서 이중고

사우디 가스 플랜트 공사 현장.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국내 주택시장이 얼어붙자 주요 건설사들은 앞다퉈 중동으로 진출했다. 해양 플랜트를 중심으로 각종 인프라 사업이 사우디 등에서 발주됐기 때문이다.

상당수 사업은 현지 법인이 있어야 참여할 수 있어 건설사들은 지사보다는 법인 설립을 선택했다. 사우디 상법상 증자 등의 절차가 복잡해 자본금 납입 대신 자금 대여 형식으로 법인 규모를 키웠다. 현지 법인과 자금 대여 계약만 체결하면 신속하게 자금을 수혈할 수 있다는 점도 건설사들이 자금 대여를 늘린 이유다.

하지만 유가가 급락하기 시작하면서 신규 수주는 뚝 끊겼다. 2014년부터 8년간 사우디 정부의 재정수지가 적자를 이어가며 발주 여력이 줄어든 데 따른 것이다. 2010년 470억달러에 이르던 국내 건설사들의 중동 수주 규모도 2019년에는 50억달러로 급감했다.이런 가운데 외국 회사의 현지 법인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사우디 세무당국의 관행은 경영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B건설사는 2021년 현지에서 적자를 내고도 3800만달러(약 514억원)에 이르는 법인세를 부과받았다. 사우디 정부가 매출원가와 판매관리비만을 기준으로 11.69%의 이익률을 임의로 설정해 법인세를 부과한 것이다.

사우디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은 “사우디 정부는 외국 기업이 현지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익을 내고 있다고 간주한다”며 “상당한 수익을 부당한 방법으로 빼돌리고 있다고 판단해 손실을 보고 있는 법인에 무거운 법인세를 부과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신규 해외 수주에도 악영향

이런 가운데 건설사들은 이들 법인과 관련해 한국 정부에 추가 법인세를 부담하고 있다. 현행 한국 법인세제는 자회사가 법적으로 파산하지 않으면 모회사가 관련 손실의 손금산입(비용처리)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손금산입을 하면 해당 비용만큼 법인세 과세표준에서 제외돼 법인세를 절감할 수 있지만, 현지 법인의 파산이 불가능한 중동 진출 건설사들은 관련 법규를 활용할 수 없는 것이다.오히려 사업 확장을 위해 선택한 현지 법인에 대한 자금 대여가 세금 부담 증가의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2010년대 초 현지 법인에 수천억원을 대여한 한 대형 건설사는 대여금의 이자수익 명목으로 지난해 100억원 이상의 법인세를 납부했다. 같은 해 이 건설사의 영업이익이 1000억원대 초반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한 해 벌어들인 돈의 10% 가까이를 수익도 내지 못한 중동 사업과 관련한 세금으로 낸 것이다.

건설사들은 적극적인 해외 사업 진출을 위해서는 국내 법률 인프라 정비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과 유럽 주요 선진국은 대여금 및 이자채권을 사실상 돌려받기 어려울 것으로 간주한 경우 해외 법인 손금산입을 위한 기준을 대폭 완화하고 있다. 손실을 대손금(회수할 수 없는 채권)과 대손충당금(미래에 발생할 손실에 쓰기 위해 미리 쌓아두는 자금) 등으로 인정해 법인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네옴시티 건설,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 등 해외 건설 붐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국내 건설사들은 사업 진출을 망설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 같은 소극적인 사업 진출이 해외 신규 수주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는 만큼 관련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종환/노경목 기자 won04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