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호 칼럼] 나와 다르면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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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세계인권선언 1조는 오늘날 매우 비현실적인 외침이 되어 버렸다. 현실에서 우리는 나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면 동지로, 나와 생각이 다르면 ‘없어져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문제는 이러한 집단 착각이 대한민국을 넘어 전 지구적 규모로 과열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인 다수의 뜻을 존중하고 생각의 다양성에 대한 배려도 사라지고 대립만 격화되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정부의 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검찰이나 법원의 법적인 판단도 내 뜻과 맞으면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이 된다. 이러한 집단 착각은 인터넷과 유튜브, 그리고 각종 SNS를 통해 ‘집단 광기 표출의 장’이 대중화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당신은 성공적인 인생이란 뭐라고 생각하는가? 다음 A와 B중 하나를 선택해보시기 바란다.
A: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룰 때 성공적인 삶을 산 것이다.
B: 사회적으로 높은 명성과 부를 축적하고 유명인사가 될 때 성공적인 삶을 산 것이다.
당신은 A와 B중 어느 쪽을 선택했는가?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A와 B중 어느 쪽을 선택할까?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는 A를 답이라 생각하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B를 선택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집단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다. (2019년 Populace 연구)다수의 사람들이 성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5천2백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97%는 A가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92%는 대다수가 B를 답으로 택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개인적 성공 외의 분야인 교육, 의료, 법조계 등 모든 영역에서 집단 착각이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집단 착각은 정치, 경제, 전쟁, 기후위기 등 모든 것에 대해 색안경을 씌운다. 우리의 윤리적 행동 양식뿐 아니라 어떤 음식을 선택할지에 대해서도 집단 착각의 영향을 받는다.
일상에서 집단 착각이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때, 집단 착각을 개선해야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러기 위해는 먼저 집단 착각이 왜 존재하는지 근본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누구나 한 번 정도 들어봤을 만한 실험을 살펴보자. 여자 대학생을 대상으로 화장실 이용 후 손을 씻는지 물어봤을 때, 연구자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 중에는 77%가 손을 씻은 반면, 연구자가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들은 고작 39%만이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갔다.
별 한심한 실험도 다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집단 착각의 원인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실험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며 다른 이가 지켜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행동의 변화가 발생한다. 이처럼 다른 이들과 행동을 조율하고 싶은 충동을 ‘순응 편향(conformity bias)’이라고 한다. 이 현상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각인된 생물학적 본능이다.
집단 착각이 존재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내면에 사회적으로 망신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포심은 진실을 말하는 것을 꺼리며, 임금님이 실은 벌거벗고 있다고 감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지구의 중력 마냥 군중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게 된다.‘구멍의 제1법칙’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국의 재무장관과 국방장관을 역임했던 데니스 힐리(1917~2015)가 남긴 말이다. 이 법칙의 핵심은 “구멍에 빠져있다면 삽질을 멈추라”는 의미다.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찰하고 그들의 의도를 보다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의 판단을 내던진 채 맹목적으로 다른 이들을 추종하고픈 악마의 유혹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나와 상대방의 개인적인 판단을 지키기 위해서만 필요한 일이 아니고 사회 전체의 생존과 건강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경영평론가(ijeong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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