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 '겨울나그네'와 발레의 '프로미나드'가 생각나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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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단비의 발레의 열두 달“여기저기 나뭇가지에 단풍 든 잎이 남아 있다. 나무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희망을 걸고 잎사귀 하나를 지켜본다. 아, 그 잎이 땅 위에 낙엽지면 내 희망도 따라 떨어진다. 나 또한 대지에 몸을 던져 희망의 무덤에서 운다.”
- 슈베르트, 겨울나그네(Die Winterreise) 중 16곡 ‘마지막 희망(Letzte Hoffnung)’
슈베르트(1797~1828)의 연가곡 <겨울나그네> 중 ‘마지막 희망’에서는 노래 사이로 가을낙엽이 흩어지는 것처럼, 청년의 눈물이 흩뿌려지는 것처럼 점점히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실연한 청년이 낙엽처럼 바스라진 감정을 안고 겨울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상황이 이 노래에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계절에 실연을 당하든 사랑을 잃은 자의 마음은 이미 겨울이 아니겠는가.우리나라에서는 이 연가곡에 '겨울나그네'라는 낭만적인 제목을 붙였는데 이 곡의 독일어 원어 제목 ‘Winterreise’에서 reise는 여행, 방랑을 뜻한다. 그래서 음악 곳곳에 여행의 발걸음이 표현되어 있다. 첫 곡 ‘안녕히’와 20곡 ‘이정표’에서 4분의 2박자로 발걸음을 표현한 것이 대표적이다.
발레에서도 여행과 산책을 표현하는 동작이 있다. 프랑스어로 ‘산책’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동작 ‘프로미나드(promenade)’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프로미나드라고 말하고, ‘투르 드 프로미나드(tour de promenade)’ 혹은 ‘투르랑(tour len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투르(tour)’는 여행, ‘랑(lent)’은 느리고 완만하게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동작은 천천히 둘러보며 산책하고 여행하는 모양새를 담고 있다. 중심이 되는 한 다리를 축으로 서고 다른 다리를 뒤로 뻗는 동작을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하고, 뻗은 다리의 무릎을 살짝 구부리면 '애티튜드(attitude)'라고 하는데 프로미나드는 아라베스크나 애티튜드 상태에서 앞을 보며 천천히 제자리에서 도는 동작이다. 즉, 주변을 빙 둘러보는 모습의 동작이다.
프로미나드는 독무로 선보이기도 하고 남녀 파드되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천천히 돌기 때문에 보통 아다지오(adagio) 음악의 선율에 맞춰서 추게 된다. 예를 들어 신고전주의 발레 <세레나데>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여성 무용수가 독무로 프로미나드를 선보인다. 보통은 발바닥을 바닥에 내려놓고 돌지만, 이 장면에서는 무용수가 포인트 슈즈를 신고 발끝으로 선 앙 푸엥트(en pointe) 상태에서 천천히 원을 그리면서 도는 게 특징이다. <세레나데>의 마지막 부분은 슬픔을 노래한 엘레지(elegy)이기 때문에 이 프로미나드는 그 감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남녀 2인무로 등장할 때는 보통 여성 무용수가 프로미나드를 하고, 남성 무용수가 손이나 팔, 허리를 잡고 함께 천천히 함께 돈다. 대표적으로 <지젤> 2막에서 알브레히트와 지젤의 파드되를 들 수 있다. <지젤>의 2막은 사랑에 배신을 당하고 죽은 지젤의 영혼이 춤을 추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 프로미나드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비탄과 밤공기의 스산함이 함께 담겨있다.
그렇다고 프로미나드가 슬픈 감성만 담고 있는 건 아니다. 흥겨운 장면에서도 많이 쓰이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고전발레에서 남녀 주인공의 결혼식 그랑 파드되(grand pas de deux) 부분이다. <돈키호테>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결혼식 장면이 좋은 예이다. 그랑 파드되는 2인무를 도입 춤인 앙트레(entrée), 아다지오, 남녀 무용수 각각의 독무와 마무리 춤인 코다(coda), 총 네 부분으로 이뤄지는데 이 중에서 아다지오 부분에서 프로미나드가 주로 등장한다. 결혼식은 신랑 신부가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랑 신부도 어떤 하객들이 왔는지, 자신들의 결혼식 분위기는 어떤지 살펴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결혼식 그랑 파드되의 프로미나드에는 이런 부분이 잘 드러나 있다.올해 11월 8일은 24절기 중 입동이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중 ‘마지막 희망’이 떠오른 것도, 발레의 프로미나드가 떠오른 것도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가는 계절의 입구에 서있기 때문이다. 11월은 한 해를 천천히 돌아보며 마무리를 준비해야 하는 달, 바로 프로미나드의 시간이다. <겨울나그네> 속 청년의 ‘마지막 희망’은 차갑지만, O.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처럼 희망을 건네는 뜨거운 가슴의 그림도 우리에게 있다는 걸, 천천히 프로미나드하며 상기시켜본다. 겨울에 들어갈 때 봄이 온다는 희망도 함께 품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