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의 코끼리' 오일가스…"탄소 포집한다는데 뭐가 문제?"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는 에너지 분야 소식을 국가안보적 측면과 기후위기 관점에서 다룹니다.

탄소포집저장활용기술(CCUS)의 세계-上
방 안의 코끼리. 게티이미지
모두가 잘못됐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먼저 그 말을 꺼낼 경우 초래될 위험이 두렵다. 결국 아무도 먼저 언급하지 않은 채 외면하고, 문제의 심각성은 더 커진다. '방 안의 코끼리'라는 격언의 의미다. 기후위기와 친환경 전환 움직임 속에서 오일·가스 등 화석연료 사용 문제가 방 안의 코끼리로 떠올랐다는 분석이 나온다.

화석연료 개발 과정에서 탄소를 포집·저장하는 기술(CCS)에 대해서도 찬반양론이 팽팽해지고 있다. 환경론자들이 "CCS 기술은 방 안의 코끼리가 된 화석연료 사용 문제를 '눈 가리고 아웅'하게 만든다"고 반대하면서다. 미국 정부가 블루수소(천연가스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포집해 만드는 수소)를 청정수소로 인정하는 발표를 내놓은 것도 이 같은 논란에 불을 지폈다.

美서 첫삽도 못 뜨고 좌초된 CCS 프로젝트, 왜?

최근 미국에서 CCS 업계의 중요 이정표가 좌초됐다. 내비게이터CO2라는 기업이 탄소 운반용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계획을 포기했다. 해당 프로젝트의 이름은 '하트랜드 그린웨이'였다. 약 2000㎞길이의 파이프라인이 미국 중서부(하트랜드)의 곡창지대를 가로지른다는 점에서다. 사우스다코타주 아이오와주 등에서 바이오 에탄올이나 비료를 제조할 때 막대한 양의 탄소가 배출되는데, 이를 포집·저장·운송하기 위해 구상된 프로젝트였다.그 가능성을 보고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 미국 에너지기업 발레로에너지 등이 총 31억달러를 투자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이프라인이 지나가는 토지의 소유주들과 "CCS는 화석연료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방패막일 뿐"이라는 환경단체의 반발 등이 거세졌다. 이들의 눈치를 살피는 주정부의 허가 절차가 지연됐고 결국 내비게이터는 해당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CCS는 기술 자체는 오래됐지만, 시장은 이제 막 형성 단계다. 특히 조 바이든 미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전략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사업으로 떠올랐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사업 한 개당 수십억 달러의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하트랜드 그린웨이를 비롯해 여러 프로젝트가 잇따랐다. 하지만 환경론자 등의 반대가 계속되면서 개발이 지연되거나 무산되고 있다. 미 중서부 전역에 내비게이터보다 더 큰 규모의 CCS 인프라를 세우기로 한 서밋카본솔루션스는 인프라 가동 예상 시기를 당초 내년에서 2026년 이후로 미뤘다.

IEA "화석연료 종말" 선언에 뿔난 산유국들…COP28 긴장 최고조

내달 말 아랍에미리트(UAE)에서 개최되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가 화석연료와 CCS의 향방을 결정짓는 분기점이 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COP28 참가국 정상들은 ▲화석연료 단계적 퇴출의 명확한 의미 ▲CCS 기술의 확장 인정 여부 등을 놓고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주로 산유국 대 비(非)산유국 간 대결 구도로 펼쳐지는 모양새다. "2030년 글로벌 수요가 정점을 찍고 나면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이 시작될 것"이라는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최근 발표는 이들 사이의 긴장감을 키웠다. 지난 5월엔 반란이 감지되기도 했다. COP28의 술탄 알 자베르 의장(UAE 국영 석유기업 대표)을 끌어내리려는 시도였다. 석유기업 총수가 기후위기 어젠다를 주도하는 중역을 맡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이유에서다. 그의 해임을 청원한 미국·유럽 의회의 의원 등 130여명은 "알 자베르가 COP28의 의장으로 있는 한 (화석연료 사용량 감축을 저지하기 위해 로비를 벌이는) 산업체 관계자들의 COP28 지분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세계 주요 산유국 중 하나인 미국의 입장은 존 케리 미 기후특사의 언행들에서 확인된다. 그는 알 자베르의 해임안을 일축하고, "전 세계의 친환경 전환 계획에 있어 엑슨모빌 셸 등 화석연료 기업 관계자들의 참여는 필수적"이라고 옹호하고 있다. 케리 특사는 오일·가스 사용을 두둔하는 과정에서 최근 부쩍 석탄 개발을 늘리는 중국과 인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사우디 역시 "당장 화석연료 비중을 줄이는 것보다 재생에너지 확대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진=REUTERS
세계석유회의(WPC) 관계자들은 "세계 각국은 오일·가스 사용에 등을 돌리기보다는 우리 업계의 탄소 전문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정에너지 선도국인 덴마크의 댄 요르겐센 기후장관은 "세계 각국은 기후위기 대응에 진전을 보여야 한다는 큰틀에는 동의하고 있지만 그 정의(definition)에 관한 합의를 이루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며 "화석연료를 계속 태우는 방 안의 코끼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환경단체 반발에도…CCS 활용한 블루수소 밀어붙이는 美정부

이 같은 논란은 수소 분야로 이어지고 있다. 수소는 친환경 전기만으로는 가동이 불가능한 산업에 필수적인 연료가 될 전망이다. 크고 무겁거나(선박, 항공 등) 에너지 집약적인 분야(철강, 유리 제조 등)가 대표적이다. 2년 전 미국 에너지부는 "2030년까지 청정수소 생산 비용을 1㎏당 1달러 수준으로 낮춰 미국을 가장 저렴한 수소 에너지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른바 수소샷(hydrogen shot) 구상이다.

이달 중순 바이든 대통령은 인프라법에 따라 총 70억달러의 연방정부 예산이 투입될 7개의 수소허브 프로젝트 선정 결과를 직접 발표했다. 이중 100% 재생에너지 발전으로 만들어지는 그린수소 프로젝트는 캘리포니아와 퍼시픽 노스웨스트 등 2곳뿐이다. 나머지는 천연가스에 CCS 기술을 접목시킨 블루수소 또는 원자력발전을 통한 핑크수소 프로젝트들이다.
화석연료 사용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블루수소를 청정수소의 범위에 포함시킴으로써 관련 논란에 사실상 쐐기를 박은 셈이다. 환경단체들은 "엑슨모빌, 셰브론 같은 미국의 에너지 대기업들이 화석연료 기반 수소에 투자해 정부 보조금 수혜를 누리는 것은 부당하다"며 즉각 비판했다. 그린수소만이 정부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진정으로 깨끗한 수소라는 주장이다.미국 수소 분야에서의 화석연료 전쟁은 두 번째 라운드가 예정돼 있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청정수소 생산에 세액 공제 혜택이 주어질 전망인데, 미 재무부는 세부 지침을 올해 말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에너지 대기업들은 IRA에서도 블루수소가 혜택을 받게 하기 위해 로비를 벌이고 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