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받은 천재' 모딜리아니에겐 '이 사람'이 있었다 [지금, 파리 전시 ③]

오랑주리미술관 -

36세에 요절한 천재 화가 모딜리아니
그를 알아본 미술상 폴 기욤과의 회고전
조각부터 초상화·누드화까지 총망라
관람객들이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이선아 기자
예술가는 고독하다.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고, 남들이 뭐래도 그걸 끝까지 밀어붙이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도 그랬다. 가늘고 긴 얼굴과 동공이 없는 텅 빈 눈. 이제는 그림만 봐도 많은 사람이 모딜리아니인 줄 알아챌 만큼 유명하지만 그의 삶은 불운, 그 자체였다. 돈이 없어서 평생 병치레를 했고, 알코올과 마약에 빠져 살았다. 어찌나 불행한 삶이었던지 동료들은 그를 프랑스어로 '저주받았다'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한 '모디'로 불렀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폴 기욤의 초상화. /이선아 기자
하지만 그런 모딜리아니에게도 그의 작품을 알아봐준 '눈 밝은' 후원자가 있었다. 젊은 미술상 폴 기욤(1891~1934)이다. 둘은 모딜리아니가 죽기 6년 전인 1914년 처음 만났다. 모딜리아니의 재능을 알아본 기욤은 몽마르트에 작업실을 구해주고, 백방으로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홍보했다. 모딜리아니의 회화 100여 점, 드로잉 50여 점, 조각 12점이 모두 기욤의 손을 거쳐 컬렉터들에게 팔렸다.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미술관이 모딜리아니와 기욤을 함께 회고하는 특별전을 연 배경이다. 둘의 사이는 예술가와 딜러, 그 이상이었다. 서로 마음을 나누는 절친이었고, 함께 모딜리아니의 작품세계를 발전시켜나갔다. 전시장 입구에 모딜리아니의 자화상과 그가 그린 기욤의 초상화가 함께 걸려있는 이유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기욤의 초상화. /이선아 기자
초상화를 지나면 아프리카 문화권에서나 볼 법한 조각 여러 점이 등장한다. 이게 모딜리아니와 기욤의 공통점이었다. 회화 대신 조각에 매료된 모딜리아는 1911~1913년 아프리카 가면에서 영감을 받아 길쭉한 얼굴과 코를 조각했다. 기욤 역시 당시 미술상으로는 드물게 아프리카 조각과 가면에 관심을 가졌다. 이 아프리카 가면은 모딜리아니가 독특한 화풍을 완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모딜리아니가 제작한 조각 작품. /이선아 기자
둘의 시너지가 빛을 발했던 건 1차 세계대전 때였다. 모딜리아니와 기욤은 건강상 이유로 전쟁에 나가는 대신 파리에 남았다. 1900년대 초 역동적인 파리 아트 신의 '증인'이 된 것이다. 둘은 파블로 피카소, 장 콕토, 막스 자코브 등 파리를 휩쓸었던 화가·영화감독·시인들과 어울렸다. 전시장엔 모딜리아니가 그 때 그렸던 유명인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막스 자코브의 초상화. /이선아 기자
모딜리아니를 알아본 건 기욤뿐만이 아니었다. 1916년 미술상 레오폴드 즈보로브스키는 모딜리아니를 지원하는 대신 누드화를 그리게 했다. 훗날 경매에서 1억7040만달러(약 1970억원) 라는 대기록을 세운 누드화가 이 때 탄생했다.
그래도 둘의 우정은 계속됐다.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모딜리아니는 프랑스 남부로 거처를 옮겨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렸다. 이 중 대표작들은 기욤에게 넘어가, 모딜리아니가 36세의 나이에 요절한 이후에도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다.기욤은 모딜리아니의 유일한 미술상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꼭 필요한 미술상이자 친구가 아니었을까. 전시는 내년 1월 15일까지.

파리=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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