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한 팔레스타인 작가 쉬블리 "침묵 속 글쓰기도 중요"

파주 DMZ평화문학축전 참가…"작가의 소명, 어둠 속 가로등 켜는 사람과 같아"
2014년 이스라엘군 공습 경고전화 받았던 경험…"온몸 마비되고 패배감 몰려와"
"그토록 진부한 비참함 앞에서 글 쓰는 자의 소명이란 가로등을 켜는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대 세계에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그렇다고 해도 가로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빛처럼,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는 있을 겁니다.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역사적 갈등을 소설로 다뤄온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49)는 10여년 전 이스라엘군의 공습 예고를 전해 듣고 난 뒤 온몸을 휘감은 공포 속에서 언어와 문학의 역할을 고민했던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25일 파주출판도시에서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개최한 '2023 DMZ 평화문학축전'의 '전쟁·여성·평화' 세션에 참가해 '다시, 쓰기 위하여'라는 발표를 통해 2014년 7월 팔레스타인 라말라에서 겪은 일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다가 팔레스타인의 한 대학에서 가르치기 위해 서안으로 돌아온 쉬블리는 당시 한 아파트에 가족과 함께 체류 중이었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그는 친구가 안전을 위해 전해준 비상용 휴대전화를 통해 이스라엘 방위군으로부터 "당신은 충분히 (공습) 경고를 받았습니다"라는 녹음된 음성을 듣게 된다.

"하루 전 가자지구에서 한 젊은 남자가 가족과 함께 사는 건물이 폭격당할 것이라는 경고 전화를 받았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가 집으로 달려갔을 땐 이미 공습으로 집이 파괴된 뒤였고 가족들도 죽거나 다쳤다고 했어요.

"
쉬블리는 "이런 전화는 이스라엘군이 사람들이 주거하는 건물을 폭격하려 할 때 하는 것"이라며 "나중에 피해자들이 이스라엘 정부를 전쟁범죄 등으로 고발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스라엘군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게 되면 30분 내로 해당 건물에 폭격이 실제 이뤄질 수도 있다고 했다.

"전화 버튼 하나만 누르면 그쪽(이스라엘군)에 상황을 다시 물어볼 수 있었는데, 온몸이 마비되고 얼어붙어 말을 할 수조차 없었죠. 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닫고는 패배감이 밀려왔습니다.

무감각하게 세상의 파괴를 마주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어요.

"
국내에도 번역된 그의 장편소설 '사소한 일'(강출판사. 전승희 옮김)은 1949년 8월 네게브 사막에서 이스라엘 점령군에 의해 강간 사살된 아랍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문제작이다.

유럽 일부에선 쉬블리가 이 작품에서 반(反)유대주의 정서를 표출했다는 비난이 일었다.

쉬블리는 올해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이 작품으로 '리베라투르프라이스' 상을 지난 20일 받을 예정이었으나, 이 상을 주관하는 리트프롬 측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에 의해 촉발된 전쟁을 이유로 시상식을 취소해버렸다.

이후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인 아니 에르노, 올가 토카르추크, 압둘라자크 구르나를 포함해 1천명 이상의 작가가 도서전 주최 측에 항의의 뜻을 전하는 등 논쟁이 일었다.
이런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쉬블리는 "작품이 나오고 나면 독자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고, 작가는 독자의 해석을 더 이상 좇지 않는다"면서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고 짤막하게 언급했다.

현재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마스와 이스라엘군의 무력 충돌과 민간인 피해 상황 등에 관한 질문에도 그는 "때론 침묵 속에서 글을 쓰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말을 아꼈다.

쉬블리는 1974년 팔레스타인 갈릴리에서 태어나 영국 이스트런던대에서 미디어·문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영국과 팔레스타인, 독일 등지의 대학에서 문화이론을 강의했다.

1996년부터 소설과 희곡 등을 쓰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2002년 첫 장편 '접촉'을 출간했다. 그가 2020년 아랍어로 발표한 장편 '사소한 일'은 2020년 전미도서상 번역문학상 후보와 21021년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예비후보에도 올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