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는 펜글씨,국악은 붓글씨…'서로 다른 우주'에 빅뱅 일으킨 김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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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표 위의 사람들]글 쓰기에도 서로 다른 두 개의 우주가 있다. 하나는 에너지 넘치는 붓글씨의 세계, 다른 하나는 섬세하고 정교한 펜글씨의 세계다. 전자가 국악(한국음악)이라면, 후자는 양악(클래식)이다.
마에스트로 김성진
前 국립극장 예술감독
"양악과 국악 융합 시도"
지휘자 김성진(68·사진)은 평행우주처럼 다른 이 두 세계의 경계에 닿아있는 인물이다. 클래식 작곡·지휘를 전공했지만 한국음악을 지휘하며 양쪽 세계를 넘나들었다. 서양 오케스트라로 한국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식이다. 지난 5년간 국립극장 예술감독을 역임하고 올해 3월 퇴임한 그는 최근 저서 <경계에 서>에 자신의 예술 인생을 담았다. 지난 23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사옥에서 만난 그와 두 음악 세계를 넘나들었던 삶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자동차 생태계를 한번 보세요. 차를 만드는 메이커가 있고, 그걸 갖다 파는 딜러가 있잖아요.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내 오케스트라가 클래식 레퍼토리만 연주하고, 우리 음악은 내버려두는 건 메이커가 되는 걸 포기하고 그저 딜러가 되겠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맞나요?"
클래식으로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그는 어쩌다 ‘한국음악 세계화’의 선봉장이 됐을까. 결정적 전환점은 1998년이었다. 귀국 직후 일자리를 찾던 그는 용인대 지휘법 강의를 나갔다. 수강생이었던 정대석 거문고 명인이 물었다. “국악도 지휘할 수 있느냐”고.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악보만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김 지휘자는 “그 질문을 받자 갑자기 뉴욕시립대에서 만난 스승 모리스 페레스의 가르침, ‘악보에 항상 답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1998년 KBS 국악관현악단 객원 지휘자로 무대에 서며 한국음악에 빠지게 됐다. “음원조차 듣지 않고 오직 악보만 보며 음악을 해석했어요. 그렇게 3주만에 국악 지휘 무대에 섰지요.”
그는 국악관현악단을 이끌고 이상규의 ‘대바람소리’를 지휘했다. 서양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악기 간 조화, 박자 및 셈여림 등을 다듬어가며 정교함을 더했다. 이른 아침 나팔꽃에 맺힌 이슬 두 방울, 거센 바람에 뿌리 채 흔들리는 대나무들…. 구체적인 연주법보다 한국적 정서를 소리로 구현하는 것에 집중했다. 클래식 지휘자가 국악을 지휘하자 색다른 음악이 나왔다. 국악계에서는 “이색적이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어린 시절을 전북 정읍 시골에서 보내서 그 풍경을 잘 알아요. 고향에 대나무 밭이 있었거든요. 대나무는 바람이 불면 뿌리가 통째로 뽑힐 것처럼 흔들려요. 그런 바람과 풍경을 설명하며 단원들과 음악을 만들어갔어요. 제가 국악기를 몰라도 우리 정서를 아니까 (제 말이) 연주자들에게 와 닿았던 거죠. ”
국악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킨 그는 2000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단장을 맡았다. 한국음악을 알아가면서 그는 “국악과 클래식을 접목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국 음악이 세계적으로 통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이후 그는 국악 프로그램으로 터키 국립 대통령 오케스트라, 슬로베니아 국립 오케스트라, 크로아티아 국립 오케스트라 등 수많은 해외 악단을 지휘하며 말 그대로 ‘K클래식’을 전파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 윤이상의 작품들을 연주하고, 국내 작곡가들에게 부탁해 한국적 요소를 넣은 곡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우리의 시조와 서양의 칸타타(대규모 종교극)를 혼합한 작곡가 이영조의 ‘시조 칸타타’, 합창과 국악을 조합한 작곡가 우효원의 ‘천년의 노래’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국악과 서양 클래식을 섞은 새로운 시도였다.
“서양 음악은 펜글씨처럼 간결하고 깔끔하죠. 아주 촘촘하게 많이 써야하죠. 반면 국악은 한번에 획을 ‘확’ 그어야 합니다. 큰 에너지를 한번에 쏟아내는 거죠. 우리는 한국인이니까, 아무리 펜글씨가 익숙해도 붓글씨 쓰는 법을 몸으로 압니다. 그걸 잘 조합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들 “클래식과 한국음악은 연주법도, 구조도 딴판인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 세상을 하나로 접목하려는 김성진을 클래식계도, 국악계도 반기지 않았다. “그게 되겠냐”는 비아냥은 일상이었다. 경계에 선 자의 외로움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국립극장에서 ‘3분 관현악’으로 요즘 트렌드에 맞춘 작품들을 발굴했고, ‘이음음악제’를 통해 젊은 작곡가들을 키웠다. ‘로봇 지휘자’를 무대에 올려 예술과 예술인의 미래에 대한 화두를 문화계에 던지기도 했다.
“서양의 클래식 음악은 사실상 소재가 바닥났어요. 한국 음악은 이제 시작이에요. 소재가 무궁무진합니다. 이걸 잘 발굴해서 가꾸면 전세계에서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게 바로 ‘K클래식’ 아닌가요.”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클래식은 클래식대로, 한국음악은 한국음악대로 가면 되지 않을까. 이미 ‘K팝’이 전세계를 휩쓴 마당에 국악 세계화가 굳이 필요할까.
“우리 음악에는 멋도 있고, 정(情)도 있고, 한(恨)도 묻어있죠. 이걸 해외에 알리고 싶은 겁니다. K팝의 인기가 언제까지 갈까요. 새로운 바람이 불면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국악은 조금 다릅니다. 뿌리가 깊기 때문에 쉽게 날아가지 않죠.”지난 20여년간 클래식과 국악의 경계에 서서 경계 밖을 바라본 그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이제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그걸 달성하기 위해 아등바등할 때는 지난 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에베레스트산 정복’은 더이상 저의 프로젝트에 없습니다. 당장 열매를 맺지 못해도 씨를 뿌리는 일을 하려고요. 좋은 작곡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국악 대중화와 세계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할 겁니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