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또 전쟁…폭발하는 '지정학 리스크'에 몸값 뛴 '이 직업'

다국적 기업들, 전직 외교관·정치인·공무원 등
자문으로 영입 사례 늘어

"지정학 리스크, 이젠 재무제표 좌우"
전문적 분석…대응 위한 인재 영입 '러시'
가자지구 남부 도시 라파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사진=XINHUA, 연합뉴스
다국적 기업들이 지정학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전직 외교관이나 정치인, 공무원 등을 자문으로 영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까지 잇단 ‘열전(hot war)’으로 관련 분야에서 보다 전문적이고 섬세한 판단을 내려야 할 필요성이 커지면서다.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도 지정학 리스크를 더욱 집중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연구소를 출범했다.

전담 위원회 만들고 임원직 신설까지

27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히타치, 산토리 등 일본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 다수가 최근 3년 새 전직 외교관과 국제관계 전문가, 해외 특파원 등을 영입했다. 미쓰비시, 미쓰이, 이토추 등 5대 종합상사로 묶이는 기업들과 은행들, 보험사들에서도 유사한 채용 과정이 있었다. 일본 중소기업 중에서도 유례없이 많은 업체 외부 컨설턴트를 고용 중이다.

조직 개편에 나선 경우도 있다. 일부 일본 기업들은 ‘최고지정학리스크책임자(chief geopolitical risk officer)’라는 고위직을 신설해 관련 문제 대응에 집중하게 했다. 미쓰비시는 사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글로벌정보위원회(global intelligence committee)’를 별도로 만들어 지정학 리스크와 글로벌 경제 상황, 신기술, 관련 정책 동향 등을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경영진에 보고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과 자국 간 관계가 경색됨에 따라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판단에서 나온 움직임이다. 중국과 대만 간의 관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 등 정치적 요인에 대한 선제적이고 면밀한 분석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비하지 못했던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여러 일본 기업에 자문을 제공한 경험이 있는 한 컨설턴트는 FT에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로 위험의 예측 가능성 자체가 낮아진 가운데, 중국의 군사 행동과 미국의 제재 강화 등 본토와 가까운 위험들의 경우 외부 자문이 필요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 기업들의 생각”이라며 “그들은 단지 한 두 가지 위험이 아닌, 당사가 전 세계 무대에서 노출될 수 있는 모든 위험의 순위를 매겨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한 전직 외교관은 “내 동료 중 두 명은 최근 무역회사로, 한 명은 에너지 회사로 출근하고 있으며 나도 1회 이상의 취업 제안을 받았다”며 “기업들은 (지정학) 리스크를 더욱더 세분화해 이해하려는 데 필수적이며, 그 과정에서 외교부가 주요 인력 풀로 사용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일본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스티븐 러브그로브 전 영국 국가안보보좌관은 올해 미 투자은행 라자드의 선임 고문이 됐고, 영국 정보기관 MI6의 알렉스 영어 전 국장은 2021년 골드만삭스에 합류했다. 로버트 졸릭 전 세계은행 총재와 파스칼 라미 전 유럽연합(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모두 글로벌 자문회사 브런즈윅에서 일하고 있다.데이터 플랫폼 알파센스에 따르면 2017년부터 기업들의 사업 보고서에 ‘지정학’이 여러 차례 언급되기 시작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에는 급증세를 나타냈다. 분석회사 JH휘트니데이터서비스 관계자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태평양 지역에서의 무력 분쟁 가능성이 커지면서 공급망과 아시아 국가 익스포저(위험노출액)를 문의하는 미국 고객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위험 평가 회사 알라코의 최고경영자(CEO)인 에이미 라신스키는 “이젠 일반 주주들도 지정학 리스크가 단지 평판 리스크에 그치지 않고, 기업 재무제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MS 가장 뛰어나”…골드만삭스도 뒤늦게 진입

지정학은 전통적으로 정치‧경제적으로 불안한 국가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석유‧가스 기업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들이 시장과 공급망을 점점 확장해 나가면서 에너지 외 다른 분야에서도 관련 수요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산업이 ‘빅테크’들로 대표되는 미국의 정보기술(IT) 부문이다.

미 IT 기업들은 최대 시장인 중국과 최대 부품(칩) 공급처인 대만 사이에 낀 처지다. 이 때문에 두 국가 간 무력 충돌 가능성에 대한 고도의 판단과 대응이 필요하다.
컨설팅 기업 런던폴리티카의 설립자인 마나스 차울라는 “기술 산업은 석유‧가스를 제외하면 지정학 리스크를 다루는 능력에 있어선 가장 앞서 있다”며 “업계에서 유일하게 뉴욕 유엔 주재 사무소를 두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MS)가 그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사례”라고 말했다. 골드만삭스도 뒤늦게 뛰어들었다. 이 IB는 26일(현지시간) 지정학적 긴장과 인공지능(AI)의 급부상에 따른 혼란 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골드만삭스 글로벌 연구소(Goldman Sachs Global Institute)’를 설립했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소를 이끌게 될 파트너인 제러드 코헌은 미 국무부 정책 기획 참모로서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보좌한 이력이 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