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형님'의 황금기 끝났다고?…주윤발 존재감, 여전히 빛났다

'큰 형님' 주윤발 주연 '원 모어 찬스'
도박꾼 아빠, 자폐증 아들의 가족 이야기

'큰 형님' 이미지 내려놓은 주윤발
90년대 풍미한 원영의와의 호흡 돋보여

영화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라토너'로 데뷔
주윤발 "제2의 인생 이제 막 시작"

'원 모어 찬스' 스틸 이미지. /콘텐트리, 팝엔터테인먼트 제공

"내 빛나던 시간은 끝난 지 오래야."

다음 달 1일 개봉하는 '원 모어 찬스'의 도입부.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린 '광휘'(주윤발 분)가 나지막이 한탄한다. 사채를 끌어다 쓴 탓에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사랑했던 여자친구는 10여 년 전에 떠난 상태. '도신'(1989) 속 주윤발의 카리스마 넘치는 도박사 연기를 기억하는 팬들한테는 낯선 모습일 수 있겠다.

'원 모어 찬스' 스틸 이미지. /콘텐트리, 팝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속 캐릭터는 패가망신했어도, 주윤발의 '빛나는 시간'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50년간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으로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온 그다.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근엄한 '큰 형님' 이미지를 내려놓고 우스꽝스럽고 친근한 연기로 변신을 시도했다. 그의 존재감은 러닝타임 내내 빛난다.

도박이라는 껍데기를 썼지만, '원 모어 찬스'는 가족의 사랑에 관한 영화다. 철없는 도신 광휘가 자폐증 아들을 만나며 따뜻한 아빠로 변해가는 줄거리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아들은 그에게 '제2의 인생'을 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제목 그대로 '원 모어 찬스(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원 모어 찬스' 스틸 이미지. /콘텐트리, 팝엔터테인먼트 제공

작품은 밤새 도박하다가 카지노에서 나온 광휘를 비추며 시작한다. 며칠은 안 감은 듯한 부스스한 머리에 후줄근한 차림이다. 땅바닥에 굴러떨어진 칩을 주우며 "행운의 징조야"라며 들뜬, 영락없는 철부지의 모습이다.

행운이 아닌 불행의 전조였을까. 그는 이날 저녁 수만 달러를 잃는다. 설상가상으로 오래전 자신을 떠난 연인(원영의 분)이 존재조차 몰랐던 아들 '아양'을 데리고 온다. 심지어 아들은 자폐증이 있다. 한 달간 아이를 맡아주면 10만 홍콩달러를 준다는 제안에 울며 겨자 먹기로 아들과 동거를 시작한다.

'원 모어 찬스' 스틸 이미지. /콘텐트리, 팝엔터테인먼트 제공

주윤발은 어쩌다 연인과 헤어졌을까. 원영의는 왜 대뜸 찾아와 아이를 맡기고 갔을까. 과거에 대한 궁금증을 안긴 채, 이들은 조금씩 인생을 바꿔나간다. 아들로부터 '허풍쟁이'라고 불리던 그는 점차 '아버지'로 인정받는다. 그렇게 "반드시 나를 찾겠다" 다짐하며 아들과 함께 인생을 건 마라톤 경기에 나선다.

주윤발의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이 돋보인다. 115분의 상영시간 동안 카지노를 누비는 폐인부터 여자친구를 홀대하는 무책임한 남성, 회한에 사로잡힌 가장의 모습을 두루 소화한다. 주윤발과 호흡을 맞춘 원영의도 반가운 얼굴이다. 주름이 제법 늘었지만, 1990년대를 풍미한 중성적이면서도 묘한 매력은 여전하다. 이번 작품에서도 우수에 찬 눈빛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원 모어 찬스' 스틸 이미지. /콘텐트리, 팝엔터테인먼트 제공

결말을 마라톤으로 매듭짓는 대목에서 실제 주윤발의 인생이 투영됐다는 인상을 준다.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그가 마라톤 연습으로 하루 하루를 보낸다니 말이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주윤발한테 배우로서의 삶에 관해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제 인생의 처음 갑자(60년)를 배우로서 보냈다면, 두 번째 갑자는 마라톤 선수로 살고 있습니다. '제2의 인생'이 열린 셈이죠."

일각에서는 "배우들의 입 모양과 실제 대사가 일치하지 않아 몰입감이 떨어진다"는 불만이 나오기도 했다. 당초 홍콩에서 사용하는 광둥어로 제작된 영화를 중국어(푸퉁화)로 더빙해 국내 수입했기 때문이다.

홍콩 영화의 황금기가 '빛 바란 지 오래'는 얘기가 나오는 게 현실이다. 다소 유치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유머 포인트들이 중간중간 거슬린다. 하지만 주윤발, 원영의의 존재만으로 극장을 찾을 이유는 충분하다. 홍콩 영화 팬들한테는 이들이 맞춘 연기 호흡을 다시 볼 수 있는 '원 모어 찬스'가 될 법하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