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분노해 주먹을 내리친 화가, 왼손으로 그려낸 팬데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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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장욱의 청춘이 묻고 그림이 답하다저스틴 모티머의 ‘Ikidusama Study’
2019년 가을, 런던 ‘엘리펀트 앤 캐슬’에 위치한 저스틴 모티머(Justin Mortimer, b.1970)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말라가는 꽃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가 물큰 피어나는 꽃그림에 이어 계조가 풍부한 어두운 배경 위로 드러난 여러 인물 풍경화를 본 순간 우리에게 닥치지 않은 불길한 사건의 징후들이 느껴졌다. 에볼라 바이러스와 시리아 난민의 이주, 시위와 폭동 현장 등에서 영감을 받은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애써 부인하거나 모른척하던 불편한 것들(방 안의 코끼리)을 정면에서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작가는 스물한살에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서 주최한 BP Portrait Award에서 1등 상을 받은 바 있고 목 잘린 여왕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 LINK: https://www.arte.co.kr/art/theme/2939) 이후 작가는 신체 일부나 전부 가 들어간 어둡거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색깔을 구축했다.
작업실 방문이 있었던 2019년 10월 이후 그는 일 년 뒤에 열릴 한국에서의 첫번째 개인전(2020.9.24~11.27, 스페이스K 과천)을 위해 열정적으로 신작 제작에 들어 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계는 COVID-19 대유행에 혼란 속으로 빠졌고 작가 또한 2020년 3월에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런던에 이동 금지령과 봉쇄령까지 내려지자 그는 작업실을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인간의 마을에서 벌어지는 불안의 징후들을 모아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두려운 오늘을 그리는 것은 엄연히 다른 행위이다. 머릿속 악몽이 현실로 나의 눈앞에 벌어질 때 그것은 소설이 아닌 일기이자 다큐멘터리가 된다. 그래서 그는 바이러스가 한참 창궐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방역복을 입은 사람의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COVID-19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집에서 드로잉과 작은 그림들 위주의 작업만 해야 하는 현실에 분노해 주먹을 벽에 내리친 5월 이후 그는 나머지 그림들을 왼손으로 완성할 수밖에 없었다.작가는 자신의 부러질 손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2016년 ‘Kult’ 시리즈를 그렸다. ‘Kult’ 시리즈는 2차 세계대전 부상자들의 손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무지갯빛 배경과 어우러진 무채색의 손은 한편으로는 경건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깨진 플라스마 TV 화면 이미지 위에 그려진 부서진 손의 배치는 그의 작품을 추상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그가 그린 수많은 손은 우리에게 수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작가가 왼손으로 그린 작품들 중 하나는 ‘Ikidusama study’이다. 워낙 못 그리는 게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재현 능력을 가진 작가 입장에선 의도하지 않아도 거칠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 오히려 신선하게 와닿았다고 한다. 인생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왼손은 향후 그의 작품에 다양한 영감과 풍부 한 표현을 가져올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하리라 생각된다. 그는 잡지나 인터넷에서 선별한 이미지들의 콜라주를 통해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림을 그린다.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Zona’는 에볼라 바이러스의 방역 현장과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폭동 시위의 장면이 한데 어우러져 탄생했다. 역광을 받은 최루탄의 연기는 그림 속에서 바이러스 방역을 위한 소독의 한 장면으로 전환된다. 해가 지며 점점 더욱 음산해지는 숲속에서 전투복 같은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우고 있다. 어쩌면 이 싸움은 내일도 그 이후에도 이어지는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는 밖으로 걸어 나와 검은 코끼리 (Black Elephant)가 되었다. COVID-19 말고도 아직 등장하지 않은 검은 코끼리들이 있다. 인간의 욕망이 만든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그리고 민족, 종교, 인종, 성(gender), 영토 등의 이유로 우리는 서로를 혐오하고 물어뜯는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른척하고 있던 문제가 일상을 장악해가고 있다. 저스틴 모티머의 회화작품은 우리 사회가 맞이할 ‘내일’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이런 예고된 재앙들은 모두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제2차 페스트 대유행이 있었던 14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4년 만에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 당시 사람들은 주술 수준의 의학에 기댔으며, 종교적 원죄에서 페스트의 원인을 찾기도 했고, 루머를 만들어 누군가를 희생시키기도 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14세기 사람들 보다 얼마나 더 나아진 것일까? 검은 코끼리들이 몰려오고 있다.
¹ 방안의 코끼리: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모른척하거나 언급하지 않는 일을 뜻함.
² 검은 코끼리: ‘검은 백조’와 ‘방 안의 코끼리’의 합성어. 검은 백조는 발생할 확률이 매우 낮은 일을 뜻한다. 따라서 검은 코끼리는 방치하던 문제가 실제 큰 사건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을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