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유용한 물건을 만드는 창의적인 일이라지만, 날 재료를 자기 몸을 써 다듬고 형체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 결국 공예를 창의라 하지만 실체는 노동이다. 금속을 연속해 두드린 정 자국, 종이나 실, 식물의 줄기 등을 손가락 혹은 손바닥 사이에 두고 비튼 작은 꼬임의 연속, 섬유의 앞면과 뒷면을 날카로운 바늘이 통과하며 늘린 바늘땀 수를 본다. 나는 반복이 만든 흔적에서 공예가가 작업실에서 보냈을 시간의 양과 노동의 정도를 가늠한다.
주인공들의 반복적인 추구와 갈망이 보이지 않는 조형 목표에 도달하고자 작업을 거듭하는 작가의 행위와 닮았다고 생각해서일까? 배세진은 일련번호를 찍은 같은 모양의 흙 조각을 거듭 쌓으면서 그 물질이 모종의 형태를 이루기까지 자신이 행한 행위의 궤적을, 소요한 시간을 스스로 그리고 타인도 볼 수 있게 가시적인 물질과 숫자의 총량으로 보여준다. 최근 1에서 시작해 10을 채울 때마다 증식했을 조각의 자릿수가 최근 6자리까지 이르렀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눈앞에 한 점 조각이 점점 부피와 형태를 갖춘 형태가 되었음을 지각하는 순간, 흙 조각에 찍는 일련의 번호가 증가하며, 작업실의 공간이 좁아진다고 느낄 때, 작가는 자신이 보낸 시간과 노동의 총량을 실감한다. 더불어 아득한 태고(太古)에 누군가 흙으로 원추형 빗살무늬 용기를 빚던 일이 자신이 지금 흙으로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