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세진은 흙으로 만든 조각 수십만개를 번호를 붙여가며 쌓았다

[arte] 홍지수의 공예 완상
떨어진 조각들 ©BaeSejin
물질을 다듬어 쓸모 있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을 공예라고 한다. 공예가는 물질을 자르고, 깎고, 다듬고, 쌓는 일련의 가공 과정을 행하여 사물을 만든다. 무엇을 선택하여 무엇을 하든 시간이 필요하다. 작업실 한쪽에서 자기 육체를 의자나 작업 테이블과 한 몸이 된 채로 오랜 시간 재료와 도구를 섬세하게 운용하며 물질을 다루는 것을 지켜본다.

제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유용한 물건을 만드는 창의적인 일이라지만, 날 재료를 자기 몸을 써 다듬고 형체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 결국 공예를 창의라 하지만 실체는 노동이다. 금속을 연속해 두드린 정 자국, 종이나 실, 식물의 줄기 등을 손가락 혹은 손바닥 사이에 두고 비튼 작은 꼬임의 연속, 섬유의 앞면과 뒷면을 날카로운 바늘이 통과하며 늘린 바늘땀 수를 본다. 나는 반복이 만든 흔적에서 공예가가 작업실에서 보냈을 시간의 양과 노동의 정도를 가늠한다.
WFG042, 2009, 58×58×60(cm) ©BaeSejin
작업실에서 노동이 인간이라 어쩔 수 없이 버거워서일까? 시간이 길수록 공예가 스스로 투입한 공력의 정도와 의미가 남달라서일까? 유독 공예가 중에는 자신들이 작업실에서 자신들이 보낸 혹은 재료가 품은 ‘공예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들이 많다.
고도를 기다리며 ©BaeSejin
배세진은 작은 흙 조각을 거듭 쌓는다. 연작(連作) 제목인 <고도(孤島) 기다리며>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의 희곡에서 가져왔다. 베케트의 희곡 속에서 두 주인공은 누구일지도, 언제 올지도 모를 고도를 무한정 기다린다.

주인공들의 반복적인 추구와 갈망이 보이지 않는 조형 목표에 도달하고자 작업을 거듭하는 작가의 행위와 닮았다고 생각해서일까? 배세진은 일련번호를 찍은 같은 모양의 흙 조각을 거듭 쌓으면서 그 물질이 모종의 형태를 이루기까지 자신이 행한 행위의 궤적을, 소요한 시간을 스스로 그리고 타인도 볼 수 있게 가시적인 물질과 숫자의 총량으로 보여준다. 최근 1에서 시작해 10을 채울 때마다 증식했을 조각의 자릿수가 최근 6자리까지 이르렀다.
WFG 317371-319149, 2020, 31×31×23(cm) ©BaeSejin
그가 종이 위에 쓰거나 흙에 새긴 숫자는 물질의 총량이자 행위의 총량을 증명하는 표식이다. 흙 조각은 작가가 매스(mass)를 만들고 벽을 세우는 데 필요한 개체들이다. 작가는 크기, 색채 다른 조각을 엇갈리거나 수직, 수평으로 켜켜이 쌓으며 다양한 구조, 배열을 만든다. 구조가 모이면 항아리, 구 같은 입체가 된다. 조각의 크기와 수, 쌓는 방식에 따라 길쭉한 것도 납작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항아리, 병과 같은 용기(用器) 형태다.
WFG 282260-284565, 2019, 33×33×35(cm) ©BaeSejin
작업의 근본이 공예에서 출발했지만, 작가가 흙을 가지고 기본적인 형태를 부풀렸다 좁혔다가 하면서 덩어리를 추구하는 일의 목적이 쓸모 있는 그릇을 만들기 위함은 아니다. 그렇다고 조각가들처럼 단순히 중력을 의식하며 흙으로 만들 수 있는 모종의 형태 변용을 끝없이 시도해 보려는 것도 아니다.
WFG 302592-305840, 2020, 29×29×32(cm) ©BaeSejin
배세진은 흙을 선택했다. 흙은 어떤 재료들보다 시간을 함축적으로 품고 있다. 인간의 지각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아득한 시간, 무수한 존재들의 DNA를 저장하고 있다. 지구의 삶, 모든 존재의 생과 사를 온전히 안에 응결한 태초의 물질이 흙이다. 오랜 세월 지구가 스스로 창조한 물질로 작가가 다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WFG193, 2012, 60×60×36(cm) ©BaeSejin
굽지 않은 흙을 조각으로 자르고, 다듬고, 숫자를 기록하며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만드는 데 소요하는 시간은 의도하지 않아도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이요, 나아가 흙 속에 있는 무수한 존재를 하나씩 소환하고 기억하는 시간이다. 작은 흙 조각을 하나씩 세우고 겹쳐 쌓는 일을 어찌 끝까지, 매번 의식하며 할까? 반복이 부여하는 몸의 리듬을 타고 자르고, 쌓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덧 시간의 흐름이 의식에서 사라진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눈앞에 한 점 조각이 점점 부피와 형태를 갖춘 형태가 되었음을 지각하는 순간, 흙 조각에 찍는 일련의 번호가 증가하며, 작업실의 공간이 좁아진다고 느낄 때, 작가는 자신이 보낸 시간과 노동의 총량을 실감한다. 더불어 아득한 태고(太古)에 누군가 흙으로 원추형 빗살무늬 용기를 빚던 일이 자신이 지금 흙으로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배세진, 개인전 &lt;지속, 반복, 변형, 순환&gt;, 2022. Print bakery, 서울 ©BaeSe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