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세종대왕의 통계기반 의사결정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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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일 통계청장조선왕조실록은 세계가 감탄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이다. 조선은 왜 6400만 자나 되는 방대한 기록을 남겼을까. 당대사를 기록해 후세에 권계하기 위함이었다. 후세인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서 역사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와 시대를 뛰어넘는 리더십을 배우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비가 아이를 낳으면 1주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관비들이 출산 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세종대왕은 7일이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린다. 또 출산이 임박한 1개월 전부터 임신부를 업무에서 제외하라는 명령도 내린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남편도 30일 동안 쉬게 하는 남성 육아휴직제도도 시행한다. 이를 두고 해리 해리스 전 주한 미국대사는 세종대왕을 ‘시대를 앞선 르네상스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세종대왕의 르네상스적 면모는 실록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종 12년에는 수확량의 10분의 1을 징수하던 기존 방식에서 토지 1결에 10두를 걷는 정액제 방식으로 세제를 개편하고 백성에게 의견을 물었다. 호조가 17만 명을 대상으로 5개월에 걸쳐 여론조사를 했다. 찬성이 많았다. 하지만 세종은 평야 지대와 산지 지역 백성 간의 의견 차이를 발견했다. 14년 동안 세제를 개선하고 보완한 뒤 세종 26년에 법률을 확정 짓는다.
세종대왕의 여론조사를 통한 세제 개편은 지금 정부가 시행하는 통계 기반 정책 수립과 데이터 행정의 원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정부 정책은 국민의 삶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국민의 공감을 얻은 뒤 추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행정을 효과적으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통계와 데이터를 통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정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세종대왕은 500년 전에 깨달은 것이다. 그야말로 선각자다.
현대사회에서 통계와 데이터의 중요성은 비단 정책과 행정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시대에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개인은 물론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읽고 쓰는 능력만큼이나 통계와 데이터를 활용하는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통계청도 국민과 기업, 정부가 통계와 데이터를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필요한 통계를 적기에 생산하는 것은 물론 데이터를 융합·결합할 수 있는 통계데이터센터를 늘리고, 초거대 AI를 기반으로 통계를 쉽게 찾을 수 있는 ‘통계 비서’ 서비스 등을 내년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이다. 이를 통해 500년 전 세종대왕이 역사에 새긴 통계와 데이터 활용 DNA가 확산하고 대한민국이 데이터 강국으로 세계를 선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