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구글이 '될성부른 나무'란 걸 알아본 사람들…벤처투자의 역사 [책마을]


세바스찬 말라비 지음 / 안세민 옮김
위즈덤하우스 / 756쪽 / 3만5000원
창업 스토리, 벤처 성공 신화…. 이런 단어를 들으면 흔히 창업자의 일대기를 떠올린다. 애플, 구글 같은 빅테크의 창업자가 어떻게 아이디어를 찾고, 어떤 역경을 뚫고 오늘날 자리에 올랐는가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기업은 기술이나 아이디어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아이디어가 기업이 되려면 자금이 필요하다. 그것도 꽤나 많이. 벤처의 역사를 벤처투자자들의 역사와 함께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최근 출간된 <투자의 진화>는 오늘날 글로벌 기업을 탄생시킨 벤처투자자들에 대한 책이다. 20세기 중반 벤처투자의 시작부터 오늘날 벤처투자업계까지, 전 세계의 생활을 바꿔온 기업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태로 자리매김했는지 그 진화의 역사를 보여준다. '포브스'지는 이 책을 "대단히 웅장하고 매우 중요한 책"이라며 강력 추천했다.

벤처투자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실리콘(반도체)을 처음으로 밸리(서부 해안)에 들여왔던 윌리엄 쇼클리의 회사에서 일어난 반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쇼클리의 고압적 리더십에 질려버린 '반동분자' 8명은 창업을 꿈꾼다. 이들의 구상은 담대했지만 은행 대출을 받기에 그들은 너무 가진 게 없는 초보 사업가였다.

이 8명이 세운 페어차일드반도체에 사업가 아서 록이 자금 지원을 한 게 실리콘밸리 역사상 첫 번째 벤처투자로 알려져 있다. 페어차일드반도체는 기존 게르마늄 소재 반도체가 아니라 실리콘 소재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고, 반도체 활용처를 방위산업에서 전자산업으로 넓히면서 반도체 시장의 지각변동을 이끌었다. 록은 이후 투자금의 600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고, 이후 인텔, 애플 등에 초기 투자하며 '벤처투자의 전설'로 불렸다.벤처투자자들의 지원은 단순히 돈을 대는 데 그치지 않는다. 투자한 기업과 운명공동체가 된 투자자들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경영진을 추천하거나 다른 기업과의 협력을 주선한다.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 역시 벤처투자자였던 존 도어의 추천을 통해 리더가 됐다. 비록 구글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원한 CEO는 스티브 잡스였지만.

저자는 극소수 벤처의 폭발적 성공을 '거듭제곱의 법칙'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성공보다 실패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성공하면 그 모든 실패를 감당할 만큼의 성과를 거둔다는 것이다.

성공 신화만 나열해서는 재미도 교훈도 없기 마련이다. 책은 잘못된 투자로 큰 위험에 처한 위워크와 우버의 사례도 들여다 본다. 벤처투자자들은 은행, 헤지펀드와의 과열 경쟁 속에서 위워크 창업자 애덤 노이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슈퍼 의결권'(강력한 복수의결권)을 허용했고, 이는 위워크 신화를 무너뜨리는 횡령과 부패의 신호탄이 됐다. 노이만은 이사회를 무력화시킨 뒤 본인 명의 건물을 위워크에 비싸게 임대하는 식으로 회사와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했다.저자 세바스찬 말라비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경제경영 전문 칼럼니스트다. 영국 이튼칼리지와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이코노미스트'와 '워싱턴포스트' 등에 칼럼을 써왔다.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두 차례나 올랐고, 지금은 미국외교협회에서 국제경제선임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에너지관리공단을 거쳐 경제경영서를 전문적으로 번역하고 있는 안세민 번역가가 한국어로 옮겼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