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입고 외제차 타면 뭐하나…남현희·전청조 '씁쓸한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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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시장' 연상케 하는 남현희·전청조19세기 영국의 대표 소설가인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의 작품 '허영의 시장'(Vanity Fair)에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가난한 화가의 딸로 태어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베키와 수동적인 성격의 양갓집 자제에서 부친이 파산한 후 가난을 견뎌내고 사랑을 찾는 아밀리아가 그 주인공이다.
전 펜싱 국가대표 남현희와 전청조 사건에서 '허영의 시장'이 떠오른 것은 베키 때문일 것이다. 베키가 '상류층'이 되기 위해 보여준 일부 모습이 이들과 흡사한 탓이다. 베키는 탐욕과 허영으로 남을 이용해 상류 사회에 진입하지만, 결국 추악한 소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서울이 다 보이는 시그니엘에서 검찰·경찰로
과거 한 방송에서 어렸을 때 가정 형편이 어렸웠다고 고백한 남씨는 "'가난하기 싫다' 생각이 들어 운동만 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게 죽을 힘을 다해 운동한 그는 국제 대회인 올림픽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고, 방송국 해설 위원과 펜싱학원 사업을 운영하며 성공가도를 달리게 됐다. 집안의 빚도 남씨가 다 갚은 것으로 전해진다.학창시절 강화도의 한 돈가스집이 단골로 알려진 전씨가 최근 남씨와 함께 발견된 곳은 한국 최고급 주거시설 중 하나인 서울 잠실 시그니엘 레지던스였다. 여러 의혹이 불거진 후 이들은 한순간에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이제는 검찰과 경찰로 향하게 됐다.
남씨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명품 의류, 액세서리, 벤틀리 차량 등 슈퍼카로 도배돼 관심을 끌었다. 상당수는 전씨가 준 선물로 알려졌다. 남씨는 지난달 30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전 씨가 상위 0.01% 고위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옷을 명품으로 꼭 입어야 한다고 했다", "차도 고가의 차를 타야지 엄마들 사이에서 말이 안 나온다고 했다" 등 주장을 했다. 전씨는 체포 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남씨가 벤틀리를 타고 싶다고 해 현금으로 구매했고 (사기) 피해자 돈으로 산 게 맞다"고 주장한 바 있다.이번 사건을 향한 국민적 관심은 최근 마약 의혹 사건에 연루된 이선균보다 높을 정도로 사회적 충격을 주고 있다. 전씨에 대해 성별, 사기, 사칭 의혹 등이 불거지자 두 사람은 결별했고, 이후 경찰청장까지 나서며 수사에 이르렀다. 경찰이 지금까지 파악한 전씨의 사기 범해 피해자 수는 15명으로 피해 규모는 19억원을 넘고 있다. 경찰은 남씨의 공범 의혹도 조사 중이다.
전씨가 남씨가 이미 수개월 전부터 자신이 재벌그룹 혼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일각에서는 공범 의혹과 더불어 범죄수익은닉규제법에 따라 남씨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결국 2일 남현희 측은 벤틀리를 포함한 전씨 관련 물건에 대해 경찰의 압수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무엇이 행복
마치 허영의 시장처럼, 이번 남현희·전청조 사건은 한국 사회의 허영심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다. MZ(밀레니얼+Z)세대를 중심으로 SNS에서 과시적 소비를 '전시'하는 현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명품 소비는 늘어나는 한편 신용 불량자도 함께 증가하는 모양새다. 감당도 못 할 명품 등 각종 소비에 빚더미에 앉은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허영의 시장'을 견인하는 한 가운데에는 SNS의 성장세가 있다. 빅데이터 플랫폼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최근 인스타그램의 월간 활성 사용자 수(iOS+안드로이드, 중복포함)는 1900만명을 웃돌고 있다. 2021년 9월 이후 1900만명 아래서 움직였는데, 엔데믹(전염병의 풍토병화) 이후 오프라인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다시 증가세를 보이는 것이다.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지난 1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1인당 명품 소비 비용은 325달러로, 미국 280달러, 중국 55달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이는 한국의 구매력 증가와 과시적 욕구에서 비롯됐다고 모건스탠리 애널리스트들은 분석했다. 한국신용정보원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30대 이하 청년 금융채무 불이행자는 반년 만에 7% 늘어난 23만1200명으로 집계됐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체면 문화는 조선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한국에서 굉장히 오래된 문화다. 그것이 최근 들어서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과시적 소비 행태로 나타난 것"이라면서 "팬데믹 때 극성을 떨었던 과시적 소비가 여전히 이어지는 모습인데, 최근 경기 분위기를 종합했을 때 이러한 소비 형태는 상당 부분 우려가 제기된다"고 밝혔다.새커리는 책에서 베키를 직접 심판하지 않는다. 단지 베키와 아밀리아를 대조시키며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끝낸다.
"아! 헛되고도 헛되도다! 도대체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은 사람이 있을까?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은들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
신현보 한경닷컴 기자 greaterf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