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가 첼로 하나 그려달라는 장드롱 부탁을 10년 만에 들어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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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코난의 맛있는 오디오몇 년 전 프랑스 출신 첼리스트 모리스 장드롱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LP로 재발매되었다고 해서 들어보던 중이었다. 사실 이 LP는 발매되기 몇 달 전 테스트 프레싱을 들어보면서 연주는 물론 음질도 좋아 내심 기대가 컸던 LP다. 필립스 모노 초판은 꽤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앨범이고 모리스 장드롱의 인생연주가 총 세 장의 LP에 빼곡히 담겨 있는지라 소장가치도 높은 편이다.
물론 오리지널이 가장 좋은 건 사실이지만 때로 재발매는 잊고 있었던 연주와 사람을 다시 소환하며 음악적 가치와 감동을 재발견하게 만든다는 데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모리스 장드롱이 연주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다보면 몇 년 전 본 영화 [마지막 사중주] 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사중주 단원 중 한 명인 피터가 학생들에게 레슨을 하는 부분이다. 첼로를 일약 클래식 음악의 전면으로 등장시킨 연주자 중 한 명인 파블로 카잘스가 피터에게 4번 프렐류드를 연주해보라고 했다. 이어 ‘알레망드’까지 연주했다. 피터는 이 날 극악의 연주에 비참했지만 파블로 카잘스는 훌륭하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러나 말년의 어느날 피터가 카메라 앵글에 잡힌다. 베토벤 현악 사중주 14번을 가르치며 악기 튜닝을 새로 할 겨를 없이 쉬지 않고 연주하도록 지시하던 피터. 마지막 연주회에서 자신은 더 이상 연주를 따라갈 수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연주자에게 바통을 넘기는 장면은 그래서 더 슬펐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최선을 다해 거기, 마지막 무대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모리스 장드롱의 이 앨범은 그가 활을 놓기 전 최전성기 녹음이다. 프랑스 출신답게 우아하고 기품이 넘친다. 기음과 배음, 화성과 멜로디가 아름답게 화합하며 모든 음표들이 자연스럽고 포근하게 융화된다. 온건하면서도 단정하고 깊은 울림이 고즈넉한 운치로 승화한다. 빈틈이 없으면서도 단아한 연주가 주는 잔잔한 여운은 그가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해왔는지 알려준다.
아마도 모리스 장드롱도 어렸을 땐 ‘마지막 사중주’의 첼리스트 피터 같은 모습이 있지 않았을까 넌지시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에게도 카잘스 같은 선생님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에겐 악보와 악기만 있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오로지 악보를 따라 자나 깨나 연습하는 것 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섯 살 때 첼로 수업을 받기 시작해 니스 음악원 및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했지만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애국자이자 음악인. 그에겐 오로지 피나는 연습으로 완성된 위대한 첼리스트였다.
‘마지막 사중주’의 피터 그리고 장드롱과 피카소 모두 엄청난 연습을 통해 그만한 자리에 올랐을 것이라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다. 피터는 거장 파블로 카잘스의 말 한 마디에 감동했고 깨달았다. 그리고 흔들리거나 방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위 장드롱과 피카소의 일화는 장드롱이 1985년 내한해 월간지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꺼낸 이야기로 당시 장드롱은 그 피카소와의 일로 인해 더욱 더 연습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우리는 나이와 성별, 지식과 경험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그 사고 같은 한 순간이 때로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기도 한다. 만일 피터에게 카잘스의 격려가 없었다면 장드롱에게 피카소가 그림을 그려주지 않았다면 그들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에 맡기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