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자체생산한 플루토늄을 美 핵무기 전문가에게 보여준 이유 [책마을]

핵의 변곡점

시그프리드 해커 지음
천지현 옮김│창비
612쪽│3만원
"우리가 만든 걸 좀 보시겠습니까?"

미국 핵무기 전문가들이 2004년 북한 영변의 핵시설을 찾자, 리홍섭 핵과학연구소장으로부터 이런 질문이 돌아왔다. 세계적 핵물리학자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에는 0.2㎏가량의 플루토늄 조각을 밀봉한 유리병이 쥐어졌다. 헤커는 당황했다. 북한은 이미 핵폭탄의 주재료인 플루토늄을 자체 생산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자기들의 기술을 애써 숨기려고 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북한은 핵시설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무엇을 달성했는지를 바깥세상에 보여주려 열심이었다"고 회상한다. 왜 그랬을까.
세계적인 북핵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가 7일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특별초청강연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핵의 변곡점>은 당대 최고의 핵무기 전문가 중 한 사람인 시그프리드 해커가 직접 보고 경험한 북핵의 실상을 증언한 책이다. 저자는 '맨해튼 프로젝트'로 유명한 로스앨러모스국립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이번 책을 통해 2004년부터 7년간 매년 북한 영변 핵시설을 최전선에서 시찰한 기록을 엮었다.

오늘날 북한은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핵무기 보유국이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러시아와 더불어) 미국을 겨냥할 가능성이 높은 3개국 중 하나"다. 2017년 함경도 만탑산 핵실험이 유발한 규모 6.3 지진으로 유추할 때, 북한은 히로시마 폭발 규모의 15배가 넘는 핵폭탄을 보유한 상태다.
&lt;핵의 변곡점&gt;(시그프리드 헤커 지음, 천지현 옮김, 창비)
저자는 북핵 개발을 '이중 경로 전략'의 틀로 분석한다. '북한이 핵 개발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외교를 활용했다'는 기존 통념과 상반되는 관점이다. 그는 북한이 외교와 핵 개발 중 한쪽을 우선한 것이 아니라 양쪽을 동시에 추구했다고 본다. 하나의 노선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고, 자국 내의 불안감을 잠재워야 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자국의 핵기술을 해외에 대놓고 선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냉전 이후 북한의 생존을 위한 최선의 길은 미국과의 화해였다. 소련은 무너졌고 중국은 고압적이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북한 지도부가 '힘을 통해 화해를 달성하겠다'는 전략을 구상했다고 주장한다.
세계적인 북핵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가 7일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저자는 "비핵화로 일관한 미국의 결정은 북한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처사"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북핵 협상이 실패하게 된 결정적 순간들을 '핵의 변곡점'이라고 부른다. 조지 부지 전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명명한 시점, 오바마 전 대통령 시기 북한의 로켓 발사로 '북한과 함께할 수 없겠다'고 결심한 순간, 트럼프 전 대통령 집권기 등이다. 지지부진했던 북미 핵 협상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결렬로 이어졌다. 그 반작용으로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북한의 의존도가 높아졌다. 저자는 "러시아·중국과의 협력이 당장의 생존에 도움이 될지 몰라도, 북한의 번영을 이루진 못할 것"이라며 "북한이 다시 대화하려고 돌아서는 때가 있다면, 핵의 변곡점이 주는 교훈을 새기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