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키예프가 이끈 빈 필…'황금빛 사운드'가 감탄을 일으켰다 [빈 필 7일 공연]

7일 빈 필하모닉 내한 공연

피아니스트 랑랑 협연
풍부한 상상력, 섬세한 감각 두각

소키예프 지휘…흥미로운 해석 보여줘
빈 필 고유의 음색과 기능미 드러나
러시아 출신 명장 투간 소키에프가 지난 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 최혁 기자
올 가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들의 잇따른 '내한 러시'로 인해 빈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대한 국내 클래식 팬들의 관심은 예년만 못한 것처럼 보였다. 베를린 필,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등의 경쟁자들은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데 반해 빈 필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도 꾸준히 한국팬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조성진, 임윤찬 같은 '한국의 슈퍼스타'들이 협연자로 붙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그럼에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빈 필의 첫 날(7일) 무대는 클래식 마니아라면 꼭 찾아들어야 할만한 공연이었다. 각별하게 주목할만한 포인트가 몇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다소 이례적이었던 프로그램이다. 최근 10년간 빈 필의 내한공연 프로그램은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브루크너 슈트라우스 등 거의 예외없이 독일·오스트리아 계열 작품들로 채워졌었다. 물론 ‘오스트리아 대표 교향악단’인 빈 필의 내력과 정체성, 그리고 국내 관객들이 이 악단에 기대하는 바를 감안하면 지극히 당연한 선곡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빈 필의 전부일까? 홈그라운드인 빈과 잘츠부르크에서 빈 필은 상당히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하는 악단이고, 그들의 모체인 빈 국립 오페라에서의 레퍼토리 또한 무척 다양하다. 따라서 최근 정기연주회 프로그램이었던 생상스와 프로코피예프를 빈 필이 그대로 들고 온 이번 공연은 그 동안 우리 관객들이 간과했던 빈 필의 또 다른 면모를 마주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러시아 출신 명장 투간 소키에프가 지난 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 최혁 기자
두번째 포인트는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의 협연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생상스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 특별했다. 주지하다시피 랑랑은 2017년 팔 부상으로 공백기를 가졌고, 복귀 후에는 비교적 손에 무리가 가지 않는 레퍼토리들을 주로 다뤄왔다. 이전에 즐겨 쳤던 소위 ‘비르투오소 레퍼토리’들은 피했다. 협주곡이라면 모차르트나 베토벤 초기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그 스스로 탁월한 피아니스트였던 생상스조차 부담스러워 했던 난곡이다. 그렇다면 이제 랑랑은 강력하고 현란했던 과거의 피아니즘을 온전히 회복한 것일까?이번 협연을 통해 확인한 랑랑의 연주력은 기술적으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원활하고 설득력 있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약점은 주로 오른손에서 감지됐는데, 빨리 쳐야할 구간에서 타건의 강도와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연주하는 것)의 명료도가 다소 떨어졌던 것. 하지만 이런 약점은 랑랑 특유의 풍부한 상상력과 재기발랄한 감각으로 덮어졌다.

그중에서도 1악장에서 두드러진 다채로운 터치와 뛰어난 즉흥성, 2악장 중간에서 의표를 찌른 돌발적 악센트, 3악장에서 순간적 변속을 통해 긴장감과 흥분감을 한껏 고조시킨 수법 등이 특히 돋보였다. 아울러 랑랑의 변화무쌍한 연주를 빈틈없이, 세밀하고 효과적으로 뒷받침한 지휘자와 빈 필의 반주도 일품이었다.

마지막 포인트는 지휘자 투간 소키예프의 존재였다. 일단 소키예프는 향후 수십 년간 지휘계를 책임질 세대의 선두 그룹에 속한다는 점에서 이전에 빈 필과 함께 내한했던 거장급 지휘자들과는 결이 달랐다. 게다가 이번 프로그램은 러시아에서 공부했고 프랑스 굴지의 악단을 오랫동안 이끌었던 그의 이력이 반영된 측면이 컸을 것이다.특히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제5번’은 그가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을 이끌던 시절 음반 녹음도 남겼던 장기 레퍼토리다. 작곡가의 대표작이자 옛 소련 최고의 교향곡 중 하나로 꼽히지만, 상당수 청중들이 난해하고 지루하게 느낄 수 있는 이 대작을 소키예프는 차분하고 온건한 해석으로 들려줬다. 템포는 대체로 느린 편이었고 주제나 섹션간 대비는 완화된 경향이 있었다. 덕분에 이 곡을 낯설어했을 관객들의 부담은 줄어들었겠지만, 한편으론 프로코피예프 음악 특유의 자극적 쾌감과 극적 선명성이 희석된 감도 없지 않았다.
러시아 출신 명장 투간 소키에프가 지난 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뒤 청중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최혁 기자
하지만 소키예프의 해석에는 흥미로운 면도 적지 않았다. 1악장 주요 섹션들의 템포와 강도를 미묘하게 조절해 악장 전체를 거대하고 점진적인 크레센도(점점 강하게) 구도로 이끌어간 부분에서, 그의 해석이 악곡에 대한 거시적 조망에 기초한 노련하고 심도 깊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나아가 그가 선택한 여유로운 템포는 빈 필 고유의 음색과 기능미를 한층 선명하게 부각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이기도 했는데, 덕분에 우아하고 세련된 풍미를 머금은 빈 필의 음색이 도처에서 빛을 발하며 감탄을 자아냈다. 이를테면 3악장 초입에서 목관 앙상블에 이어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등장할 때의 그윽한 음감이라든가, 같은 악장 중간에 나오는 비극적 고조부를 지나 몽환적 흐름으로 복귀할 때의 환상적인 음률 등은 오직 빈 필만이 들려줄 수 있는 매혹적인 연주의 표본과도 같았다.빈 필은 이번 공연을 통해 그들만의 '황금빛 사운드'와 앙상블로 들려주는 프랑스나 러시아 음악도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청중의 반응도 사뭇 뜨거웠던 만큼 앞으로는 빈 필 내한공연에서 보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앙코르는 빈 필의 전매특허나 다름 없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서곡과 폴카였다. 오페레타 ‘인디고와 40인의 도적’ 서곡은 오묘한 화성과 재치 있는 리듬이 어우러진 오프닝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유명한 폴카 ‘천둥과 번개’는 마치 빈이라는 도시의 기운과 흥취를 청중의 가슴 속 깊은 곳까지 불어넣어주는 듯했다. 아, 끝으로 소키예프의 지휘 동작이 무척 세심하고 능수능란하고 매력적이었다는 점도 언급해둬야겠다.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