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원의 헬스노트] 한 병원 마취과 교수 7명 줄사직…"이게 필수의료 현실"

"필수의료 살리려면 수가 높이고, 소송부담 낮춰야"
미용시술에 의사 몰리지만, 경험 적어 환자안전 '빨간 불'
"의사면허 취득 직후 미숙한 상태서 환자진료하는 현실 개선해야"
서울 강남에서 마취과 의원을 20년 넘게 운영 중인 A(54) 원장은 마취 전문의가 상주하지 않는 성형외과와 피부과 의원이 주요 고객이다. 3명의 마취 전문의를 두고 일하는데도 마취 관련 의료사고가 거의 없을 만큼 진료 실적이 좋아 주변 의원들 사이에 신뢰도가 높다.

그런데 요즘 성형외과에 가면 예전과 달리 한숨짓는 일이 많아졌다.

의원에서 고용한 새내기 의사들이 수면마취 후 시술 중 환자 상태에 대한 모니터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여서 불안감이 커진 탓이다. A원장은 최근 성형외과 의원에서 환자 마취 중 겪은 황당한 경험을 기자에게 소개했다.

당시 A원장은 다른 전신마취 성형 수술을 받는 환자를 깨우고 나가려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때 옆 수술방에서 알 수 없는 경고음이 들렸다. 확인해보니 모니터에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 알람이었다.

환자는 급작스러운 경련으로 얼굴이 새파래지고 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주치의는 이런 경고를 무시한 채 시술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A원장은 "환자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 젊은 의사에게 왜 산소 공급과 응급조치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오히려 '이러다가 대부분 좋아지더라고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며 "안 되겠다 싶어 직접 간호사를 불러 산소 공급장치를 연결하고, 약물을 투여하는 등 응급조치를 4~5분에 걸쳐 시행한 끝에 위급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런 일이 발생한 건 환자를 진료하는 데 필요한 교육과 수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A원장은 "아무리 미용시술이라고 하더라도 환자의 안전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건 의사로서의 기본"이라며 "바이탈(심전도, 산소포화도, 체온 , 혈압 등) 경고 사인이 떴는데도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응급조치도 하지 못하는 의사가 많아진다면 의료사고는 필연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걱정을 하는 건 A원장뿐만이 아니다.

강남에서 비교적 환자가 많은 성형외과 의원을 운영 중인 B(58) 원장도 "새로 채용한 젊은 의사들이 혹시라도 사고를 낼까 봐 조마조마하다"며 "때문에 새로 채용한 의사들에게 가벼운 미용 외의 큰 시술은 맡기지 않고 있다"고 토로했다.

요즘 강남 일대의 성형외과와 피부과에서는 의대를 갓 졸업하고 미용시술을 하는 새내기 의사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전문의 자격이 주어지는 인턴(1년), 레지던트(3~4년)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의사 면허만 딴 채로 의원에 취직해 일하는 것이다.

앞서 A 원장이 지목한 의사도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전문의가 아니어도 이들 의사는 1천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는다고 하니, 필수의료 살리기에 대한 사회적인 고민이 무색할 지경이다.

오히려 필수의료 분야 의사들의 이탈 행렬은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를 넘어 마취통증의학과까지 번지며 가속화하는 모양새다.

국내 최대 규모의 C대학병원에서는 올해에만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7명이 잇따라 사직했다.

물론 기존에도 대학병원에서 일하다 다른 병원으로 옮기거나 직접 개원한 경우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이들이 국내 최고 급여와 대우를 받는 대학병원의 정교수 신분이라는 점에 기존과 다른 심각성이 있다.

C병원만큼은 아니지만, 서울의 D대학병원과 E대학병원에서도 최근 각각 1~2명의 마취통증의학과 교수가 사표를 내고 이직했다.

의료계에서는 이들의 이직이 이미 예견된 것으로, 무엇보다 힘든 수술실 마취와 의료 소송을 피하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지적한다.

개원가로 이동할 경우 급여 수준이 최소 1.5배 이상 늘어나고, 응급이나 당직 근무가 없거나 줄어드는 것도 이런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다.

서울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박재현 교수는 "중증질환 등으로 난도가 높은 수술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준비와 전문적인 고뇌가 필요한데도, 오직 수술의 최종 결과에 따라 별도의 소송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이 큰 게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더욱이 수술실 CCTV 설치가 제도화돼 소송 부담이 더욱 심해진 상황에서 의료행위자인 의사의 책임에 대한 요구 또한 더 거세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인 보상은 없다"면서 "새내기 의사들의 관심이 결국 필수의료 분야보다는 비응급 환자가 많은 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대한마취통증의학회가 지난해 마취과 전공의 4년차 2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이들은 전문의 취득 후 진료 현장에서 기피하는 분야로 심장마취(22%), 소아마취(18%), 중환자의학(12%), 산과마취·폐마취(각 11%)를 꼽았다.

필수의료 영역의 수술실 마취를 기피하는 현상이 뚜렷하게 읽히는 대목이다.
현장의 의료인들은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보상을 늘리는 것과 별개로 의사 면허만 취득하면 곧바로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당장 이런 시스템을 개선하기 힘들다면 이들에게 취업 후 주기적인 교육을 의무화하는 것도 나름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과 일본, 영국 등은 의사 면허를 취득한 후 1~2년간 종합병원에서 임상 연수를 해야만 단독으로 환자를 진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강성범 대한대장항문학회 이사장(분당서울대병원 외과 교수)은 "면허 취득 즉시 미용의료 분야로 가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되는 비급여 진료에 대한 근본 대책을 세워야만 젊은 의사들을 필수의료 분야에 남도록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 이사장은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치는 외과의사 수술행위 시간급여(3천400원)를 바로잡고, 정부 지원 정책가산금의 40%는 밤새워 응급수술한 의사에게 실제 보상될 수 있어야 한다"며 "대학병원에 남은 의사들이 의료소송에 대한 부담 없이 환자를 위해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필수의료를 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준흠 대한마취통증의학회 회장(상계백병원 교수)은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포함하는 비인기과에 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사명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수가가 낮고, 사고에 따른 배상액이 크기 때문"이라며 "불가피한 의료사고에 대해 면책해주는 의료사고처리특례법 등을 제정해야 필수의료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