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이 약을 드세요” 박보영이 쥐어준다면 한 움큼도 먹겠지
입력
수정
[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 - 박보영90년생 박보영이 가장 성숙한 연기를 선보인 때는 역설적으로 만18세 때인 ‘과속 스캔들’에서이다. 이때 그녀는 자신이야말로 인기스타 차태현이 과속해서 낳은 딸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 역시 과속해서 낳은 아들까지 데리고 와 무작정 그의 집에 똬리를 튼다.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후 ‘책임져!’라며 들이 닥치는 여자는 봤어도 자신을 포함해 3대까지 책임지라는 어린 여자는 보기 힘든 케이스였다.
‘과속 스캔들’은 코미디 영화였음에도 2008년이라는, 아직 보수적인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다. 이 영화가 아무런 제재없이 순탄하게 넘어 갈 수 있었던 데는 와당탕탕, 웃음과 울음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던 영리한 톤앤매너에 있었다. 무엇보다 순진무구한 청소년 싱글맘의 이미지를 연기해 낸 박보영 덕이 컸다. 박보영은 이 영화로 청룡과 백상, 대종상 등에서 신인상과 인기상을 휩쓸었다. 어쨌든 18살에 싱글 맘 역할을 했으니 가장 성장한 여인 캐릭터였다고 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박보영 그녀가 노숙하거나, 여성스럽거나, 적어도 여인이라는 표현을 얻을 정도의 이미지까지는, 당.연.히. 아니었다.
기이하게도 박보영은 무슨 역할을 맡더라도 어리고 젊은 여자의 느낌을 준다. 만년 소녀나 아가씨같은 이미지이다. 근데 이건 박보영에게는 약이자 독일 수도 있겠다. 뭐 독이란 표현은 다소 심한 것이고 약 중에서 다소 쓴 약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물론 약은 다 쓰다. 박보영이 팜므 파탈 역을 하면 어울릴까? 아니면 에로틱 스릴러 같은 영화에서 과감한 누드 연기를 해낼 수 있을까? 무엇보다 박보영이 그런 연기를 하는 것을 대중들이 받아 들일 수 있을까? 그녀가 악녀 역할을 한다면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박보영의 연기 변신은 박보영 스스로 때문이 아니라 박보영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원하는 대중들 때문에 시도하기가 힘들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벽이라는 것이다. 그건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올해 개봉된 영화 가운데 이른바 BEP를 넘긴 몇 안되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박보영은 빛난다. 멸망 직전의 지구 재난 위기의 끝에서 그래도 인간성을 지켜 내는 착한 여자(아직도 여인이란 표현은 안 어울린다.) 역으로 나온다. 영화에서 박보영은 신혼이고 남편 오빠를 너무 사랑하며, 어떻게든 살아 내되, 그래도 올바르게 생존해 내려고 애를 쓴다.
재난으로 아파트 단지 전체는 붕괴했고 동 하나만 남아 있는데 밖은 기온이 급강하한 상황(빙하기로 가고 있거나 난방 시스템의 붕괴로)이라 다들 얼어 죽는다. 이 남은 한 동에서 바깥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여자는 오직 박보영뿐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결국 인류는 멸망할지언정 아주 비참하고 ‘더티’하게 죽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인간 스스로 존엄성은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믿음을 준다.
근데 그건,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라 순전히 박보영 때문이다. 다른 주인공인 이병헌이나 박서준이 그런 희망을 주지는 않는다. 박서준의 인간성도 나중에 이기적으로 변한다. 영화란 것은 궁극으로는 희망의 전령이며 그 비둘기의 발목에 손편지를 달아 하늘로 날려 보내는 것은 배우이다. 그것도 대체로 여배우이다. 새로 공개된 OTT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어린 간호사 다은 역의 박보영은 컴퓨터 게임의 판타지 속에서 살고 있는 젊은 남자 환자의 이런 말에도 다정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다. 남자가 빠져 있는 컴퓨터 게임은 시즌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이 약을 먹으면) 백록담에 잠들어 있는 화룡, 로렌크란츠를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은은 따뜻하게 웃으며 그가 약을 먹는 장면을 바라 본다. 정신이 미친 환자들과 이런 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간호사 역을 캐스팅한다면 누구를 하겠는가. 당연히 박보영이다.
넷플릭스가 이 12부작 웹툰 소재 드라마에 단박에 투자를 결정한 것은 순전히 박보영 캐스팅 때문이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정신병동 같은 혼란의 세상에도 아침같은 희망이 있다는 얘기를 하는 작품이다.이 드라마에서 박보영은 신참 간호사이다. 온갖 환자들의 사연과 ‘미친 짓’을 겪으면서 박보영은 거꾸로 정신적으로 성장해 나간다. 진짜 사랑을,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것을 배워 나간다. 그 인간적인 모습이 정겹다. 냉소적이면서 동시에 비관적인 인생관으로 배배 꼬인 사람들에게조차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우며, 살만 한 것이라는 긍정적 세계관에 동의하게 만든다. 솔직히, 흥행 면에서 그다지 성공한 영화는 아니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박보영 연기를 가장 눈여겨 봤던 작품은 정기훈 감독(맞다. ‘애자’와 ‘반창꼬’의 감독이다.)이 2015년에 만든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였다. 스포츠지 연예부의 일상을 담은 이 영화에서 박보영은 신입 기자 도라희로 나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부장, 데스크를 향해 멀뚱멀뚱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맞받아 치는 연기를 펼친다. 부장은, 보통 다들 그러듯이 점점 더 화를 증폭시키는데 부장 역을 했던 정재영과 박보영의 케미가 아주 볼 만 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이 실패한 것은 대중들이 신문사의 실제 풍경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 하는데다, 신문 자체에 관심이 없고, 특히 스포츠 신문에 대한 약간의 경시 같은 것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건 마치 요즘도 신문이 나와, 하는 인식과 같은 것인데 영화가 만들어진 2015년은 언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의 급전직하가 시작하던 때였다.
영화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는 박보영의 최대 실패작이었던 셈이지만 그래도 허허실실 웃으며 재미있게 볼 수도 있다. 게다가 나중에는 이 ‘미친 개’ 부장과 ‘또라이’ 신입 기자가 한 연예인 남자의 스캔들을 추적 취재하는 과정에서 우리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의기투합한다. 영화는 그래서 다소 상투적인데, 박보영이 하면 그런 상투성조차 진부함의 끝판왕으로 넘어가지는 않게 한다. 박보영이 갖고 있는 천부적인 재능의 매력이다.
뭐니뭐니해도 박보영의 히트작으로 영화 ‘늑대소년’과 TV드라마 ‘힘센 여자 도봉순’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그건 박보영이 여전히 감성의 멜로와 이른바 ‘로코’라 불리는 코믹 로맨스에서 힘을 발휘한다는 얘기이다. 체온 46도의 뜨거운 늑대 인간을, 그 야성을 식히고 잠재울 수 있는 순수의 영혼 같은 여자, 혹은 도봉순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이 오히려 귀엽고 친근하게 느껴질 수 있는 여자가 박보영이다. 누군가 한명은 이 세상 한 켠에서 그런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박보영은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잔을 같이 하고 싶은 여자이다. 박보영은 우리에게 약을 쥐어 주면서 눈을 마주치고 살짝 웃을 것이다. 어서 먹으라고 여기는 정신병동이지만 내가 같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박보영이 주면 먹을 것이다. 그녀가 오랜 동안 우리 곁에 소녀의 이미지로 남아 있어만 준다면야. 그렇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