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발 닿은 곳만 그렸다" 보스턴서 봉천동까지 무너진 도시를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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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주 작가 개인전 '그라운딩'시커멓게 무너지고 어지럽게 흐트러진 아스팔트 도시의 재건축 재개발 현장들. 그 땅 위에도 풀이 자라고 사람들이 걷는다. 누군가의 터전이고 집이었던 '장소'(캔버스)에 각목과 합판이 이어진 장면들은 마치 낡은 것과 새 것이 교차하는 요즘 도시의 단면처럼 다가온다. 파괴된 것들 뒤로 정교하게 올라가고 있는 건축물들은 더이상 낯설지 않다. 한때 도시를 단단하게 떠받들었을부속품들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은 국경을 넘어 이제 어느 도시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흔한 표정이 됐다. 이문주 작가(51)는 1990년대 중반부터 보스턴, 디트로이트, 베를린 등 직접 거주했던 도시의 재개발 현장들을 찾아가 이를 회화적 풍경으로 재구축해왔다. 서울 평창동 서울아트센터 도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 '그라운딩(Grounding)'에선 초기작부터 현재 작업까지 대표작 23점을 선보인다. 이 작가의 작품세계는 리얼리즘의 성격이 강하다. "직접 발을 디뎌 본 곳만 그린다"는 신념으로 실제 풍경들을 담아낸다. 전시의 제목인 '그라운딩' 역시 맨발로 땅을 걸으며 정신건강을 도모하는 활동명에서 따왔다. 이 용어는 심리학에선 불안한 감정을 '지금'으로 돌려 현재에 집중시키는 용어로도 쓰인다. 그의 초기 작품들에선 사실상 도시를 점유하고 있는 사람의 존재가 의도적으로 배제돼 있다. 인물을 직접 드러내 감정적인 공감을 일으키는 대신, 폐허 속 남아있는 삶의 흔적들을 드러내 관람자 각자가 갖고 있는 도시의 기억과 현재를 교차해 생각하도록 한다. 서울예고와 서울대 미대·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1994년 학교 근처 봉천동과 시흥동 재개발 지역의 철거 현장들을 찾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했다. 붓질과 빛의 효과를 극대화해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를 형성했던 그의 도시 연구는 2000년 미국 보스턴으로 유학을 떠나 더 심화됐다. 작가는 "보스턴을 아름다운 대학도시이자 항구도시로 생각하지만 실제 거주하던 락스베리는 저소득층 흑인 인구가 대부분으로 복합적 도시 문제를 안고 있던 곳이었다"며 "1990년대 서울 재개발 지역에서의 풍경과 교차하는 지점들이 많았다"고 했다. 이후 그는 디트로이트, 뉴욕 브루클린 등에 살며 도시문제를 작품으로 재구성했다. 2007년부터 2년간 베를린 쿤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할 때도 베를린 장벽 건너편 구 동서독 접경지대에 있던 기차역 '오스트반호프' 연작을 그렸다. 쓸모없어진 부속시설과 버려진 사물들, 그 위로 자라나는 식물의 모습을 포착했다. 세계 주요 도시에서 애써 만든 건축물을 또다시 공들여 파괴하는 반복의 시간들. 그걸 그린 그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가 어딘 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의도적으로 사람을 배제하고, 도시의 랜드마크나 간판을 보여주지 않는 화법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나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보편적인 의식을 심어준다. 도시의 압축된 시간을 오래 탐독해온 작가는 몇년 전부터 그 땅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에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2013년 한 공원을 지나다 어르신들의 '건강백세수업'을 보고 걸음을 멈췄던 기억을 다시 꺼내게 된 것. '댄스수업', '노부부' 등에 등장하는 익명의 사람들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따뜻하며 때론 무심하다.쉽게 스쳐지나갔던 풍경이 어느 날 문득 작가의 시선을 잡아챈 것처럼, "관객들이 부모와 조부모, 자신의 미래를 떠올리길 바랐다"고. 이는 사라져가는 과거와 현재를 그려왔던 작가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전시는 11월 18일까지.
평창동 도암갤러리서 18일까지
90년대 서울 봉천동 시흥동 재개발
2000년 이후 보스턴과 디트로이트 등
도시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풍경 담아
의도적으로 인물 등 제외해 보편적 해석으로
"내 발 디딘 곳만 그린다"는 작품 철학 30년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