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아니다!"…광해군 제주 유배지 새로 밝혀져

남환박물 박물관본 기록 토대로 기존 적거지와 다른 곳 주목
광해군 사후 12년 뒤 제주 표류한 헤멜 일행도 같은 곳에 머물러

제주에 유배온 유일한 임금인 광해군의 적거지(謫居址, 죄인이 귀양살이 한 곳)가 새롭게 밝혀져 주목된다.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와 강문규 전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은 광해군의 적거지가 기존에 알려진 위치(제주시 이도일동 1474-1)가 아닌 제주목관아 서쪽 담장 너머로 추정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냈다고 10일 밝혔다.

이는 광해군의 제주 귀양살이에 관한 기록이 담긴 이형상 제주 목사의 저서 '남환박물' 박물관본(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이 최근 새로 발간돼 광해군 적거지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오면서 새로 밝혀졌다.

남환박물은 현재 2종의 필사본이 전한다.1979년 보물로 지정돼 이형상 목사의 문중에 소장된 '문중본'과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있는 '박물관본'이다.

문중본은 광해군의 적거지에 대해 '제주 서쪽 성안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박물관본은 '망경루(望京樓) 서쪽 성안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남환박물 박물관본은 광해군 적거지가 제주목관아 안에 있는 2층 누각인 망경루 서쪽 제주읍성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그 위치를 추정하는 데 매우 소중한 기록이다.
앞서 지난 1996년 제주지역 언론사 한라일보는 제주시와 협약해 88개소 유적지에 표석을 세운바 있다.

당시 사람들이 광해군의 적거지 터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현 제주시 중앙로 제주신협 건물 앞(제주시 이도이동 1474-1)에 표석을 건립했다.

표석건립자문위원들은 광해군 적거지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심의를 보류했지만 후일 명확한 기록이 나타나면 제 위치에 건립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우세해 표석을 세웠다.제주도시재생센터는 지난 5월부터 강 전 소장 등 외부 전문가와 함께 광해군 유적지 찾기에 나섰다.

이들은 현재까지 제주 전통 와가(瓦家, 기와집)의 건축양식이 남아 있는 고옥(古屋) 한 채(제주시 삼도2동 1057번지)를 발견해 광해군 적거지와 관련한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새로 추정하는 광해군 적거지 위치는 기존 위치와 직선거리로 460여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도보로 5분 이내의 거리다.

앞으로 전문가 등 검토와 고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광해군을 비롯해 제주 유배문화를 연구한 양진건 제주대 명예교수는 "광해군의 적거지가 제주목관아 서문 안쪽에 위치한 것으로 새로 밝혀지고 있다"며 "조선임금 출신 최초의 제주유배인 광해군과 최초의 제주도 서양유배인 36명의 하멜 일행의 적거지가 동일하기 때문에 동시에 기념하고 전시하는 매력적인 공간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광해군은 조선의 왕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왕이자 제주에 유배 온 유일한 왕이다.

후궁의 몸에서 서자로 태어나 일국의 왕이 됐다가 인조반정으로 한순간에 죄인의 몸이 됐다.

광해군은 '선조를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였다는 혐의와 중국(명나라)에 사대를 하지 않고 청나라에 곁붙었다는 등의 죄목으로 폐위됐다.

이후 강화도에 위리안치를 시작으로 태안→강화→교동을 전전한 뒤 1637년(인조 15년) 제주에 이배(移配)됐다.

그리고 4년 뒤인 1641년 음력 7월 1일 광해군은 67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는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현대에 들어 명청 교체기에 실리외교를 펼쳐 전쟁을 막은 '개혁 군주'라는 평가도 나온다.

광해군의 적거지는 뒷날 '하멜 표류기'를 통해 제주를 세계에 알린 하멜 일행이 10개월여 억류 생활했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광해가 숨을 거둔 지 12년 뒤인 1653년(효종 4년) 8월 하멜 일행이 승선한 네덜란드의 상선 '스페르웨르호'가 일본으로 가던 중 거센 풍랑을 만나 제주 해안에 난파하면서 승선원 중 살아남은 하멜을 비롯한 36명이 조선에 억류된 바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