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40대 '모태솔로남'...평생 '썸'만 타고 끝난 사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에드가 드가(1834~1917)
메리 커샛과의 '사랑과 우정 사이'
걸작으로 남다
'개의 노래' (1876~1877). /개인소장
자기 일에서 큰 성취를 이룬 덕분에 부와 명성을 모두 누리는 40대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미술과 음악,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화생활을 즐겨서 “오페라 없는 삶은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유머 감각도 겸비했습니다. 냉소적인 성격 때문에 “사람 신경을 긁는 경향이 있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치명적인 결점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았으니까요. 외모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입고 다니는 깔끔하고 세련된 옷은 사람들의 호감을 샀습니다.

누가 봐도 꽤 괜찮은 이 남자, 그런데 ‘모태 솔로’였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은 왜 연애를 안 한대?” 주변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이런 얘기를 화젯거리로 삼았습니다. 때로는 그에게 “왜 혼자 사느냐”고 직접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적당히 웃어넘길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스타 무용수(1876~1877). /오르세미술관
그 뒤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남자가 평생 독신으로 살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이야기를 궁금해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긴 화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한 번도 연애를 하지 않았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를요. 오늘은 그 남자, 19세기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의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드가, 인상주의를 만나다

자화상(1863).
드가는 1834년 프랑스 파리의 부잣집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문화생활을 즐겼습니다. 루브르박물관은 가족이 즐겨 찾는 나들이 장소였지요. 어린 시절 박물관에서 본 그림들은 19살의 드가가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버지는 드가가 법조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긴 한숨을 몇 번 내쉰 뒤 아들을 지원해주기로 했습니다. 말 안 듣는 아들 하나쯤 지원해줄 돈은 있었고, 무엇보다도 드가의 재능은 아버지가 봐도 너무 뛰어났으니까요.“선을 그리게. 기억을 되살려서든 자연을 보고서든, 선을 많이 그려보는 게 중요해.” 그림 공부를 시작할 때 프랑스 신고전주의 대표 거장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해준 조언은 드가의 한평생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존경하는 선배의 말을 받들어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거장들의 작품도 빠짐없이 공부했습니다. 드가는 지칠 줄을 몰랐습니다. ‘노력하는 천재’. 그를 정확히 설명하는 말이었습니다.
무대 리허설(1878~1879).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당시 파리 미술계의 대세는 역사적인 장면을 주제로 한 역사화(畵)였습니다. 제대로 된 화가로 인정받아서 돈을 잘 벌고 싶으면 정통 역사화를 그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드가에게는 옛날 위인들의 이야기를 상상해서 그리는 일이 재미없고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돈을 버는 건 그에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을 그리는 것’만이 목표였지요.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그려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이어가던 스물여덟 살의 어느날, 드가는 중요한 만남을 겪습니다. 1862년 루브르박물관에서 명작을 따라 그리며 공부하던 그에게 에두아르 마네가 말을 걸어온 겁니다. 비록 초면이었지만, 붙임성 좋기로 유명했던 마네는 드가에게 이런저런 표현 기법에 대해 조언해 줬습니다.몇 마디를 주고받은 두 천재는 금세 의기투합했습니다. 드가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한 데도 마네의 영향이 컸습니다. “위대한 화가라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그려야 한다”는 게 마네의 철학이었거든요.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875~1876). 드가는 당시 파리 사람들의 생활을 화폭에 그대로 담았다. 덕분에 드가의 작품들은 당시 웬만한 사회학 연구들보다 풍부한 정보와 통찰을 담고 있다. /오르세미술관
마네는 드가에게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소개해줬습니다. 덕분에 드가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에 여러 번 참여했습니다. 사실 드가가 자신을 인상주의자라고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인상주의라고 하기에 그의 묘사는 아주 사실적이었고 전통적인 ‘그림의 기본’에도 충실했습니다. 같이 전시한 화가 중 드가가 가장 먼저 미술계의 인정을 받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도 이런 실력 덕분이었습니다. “주제나 화풍이 좀 그렇긴 해도, 잘 그리긴 하는구만.” 소위 ‘정통파 화가’로 불리던 사람들도 드가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사랑하고 싶었지만

오케스트라의 음악가들(1872). 드가는 오페라 시즌 티켓을 보유하고 있었다.
드가가 탁월한 실력을 갖추게 된 건 그가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한 작품을 그릴 때마다 그는 괴로울 정도로 노력을 쏟아부었습니다. 다 그린 후에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끊임없이 작품을 다시 고쳤습니다. 드가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내 그림만큼 인위적인 그림은 없다. 화가는 같은 대상을 열 번, 백 번 반복해서 그려야 한다. 미술에서는 동작 하나라도 우연일 수 없다.”

장점만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완벽주의자들이 종종 그렇듯 그는 성격이 까칠했습니다. 천성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냉소 섞인 유머와 날카로운 비판으로 동료 화가들을 짜증 나게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에서 ‘내가 제일 잘 그린다’는 자부심과 우월감이 은근히 드러나는 것도 비호감을 주는 요소였습니다. 성격 좋기로 유명했던 동료 화가 구스타브 카유보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드가는 정말 참아주기 어려운 인간이야. 재능 하나는 정말로 뛰어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예술의 길을 걷는 까칠한 완벽주의자. 그런 삶에 연애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습니다. 훗날 드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이 있고, 예술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둘 중 하나만 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결혼하면 예술은 종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요. “유부남은 예술에서 반동이다.”(구스타프 쿠르베) “당신이 사랑을 한다면 그건 안 좋은 일이야. 상대방이 예쁘다면 최악이지. 예술에 대한 열정이 완전히 죽어버리거든. 예술가는 다른 모든 걸 버리고 작품에만 열정을 가져야 해.”(외젠 들라크루아)
벨렐리 가족(1858~1867). 아름다운 그림이지만 자세히 보면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왼쪽 어머니의 공허한 시선과 오른쪽 아버지의 소외된 위치가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 중간에 앉은 딸은 어쩔줄 몰라하는 듯하다. /오르세미술관
주변 사람들의 결혼 생활이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드가에게 확신을 줬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철이 들기도 전인 13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초대받아 한동안 머물렀던 고모의 집에서 직접 보고 겪은 결혼 생활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습니다. 정략결혼을 했던 고모 부부는 성격이 서로 잘 맞지 않았거든요. 고모는 드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혐오스러운 나라야. 남편은 아주 불쾌한 거짓말쟁이고. 지루하기까지 하다니까.” 드가는 생각했습니다. ‘결혼은 힘든 거구나.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힘들 것이다.’

하지만 드가는 여느 피끓는 청춘들처럼 연애와 결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의 일기장에는 “천생연분을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말이 여러 번 적혀 있습니다. 30대 중반에는 동료 인상주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를 짝사랑하기도 했습니다.
베르트 모리조가 그린 '자매들'(1869). 그림 속 자신은 드가가 그림을 그려넣어 선물한 부채를 들고 있다.
안타깝게도 모리조는 드가의 친구이자 동료인 마네에게 더 끌렸습니다. 마네와 모리조의 밀고 당기는 관계에서 드가는 ‘양념’ 역할을 하는 조연에 불과했습니다. 모리조는 바람둥이인 마네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 드가를 이용했고, 그럴 때마다 마네는 모리조에게로 돌아와 “드가는 여자를 모르고 사랑할 수도 없는 녀석”이라고 험담했지요. 드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역시 사랑과 거리가 먼 인간이구나.’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페르낭도 서커스의 라라 양(1879년). 사람들은 덧없고 일시적인 것을 그림이라는 움직이지 않는 매체 속에 고정하는 드가의 능력에 언제나 감탄했다. 그는 자유자재로 구도를 짰고, 치밀한 계산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스냅 사진만큼이나 정확하면서도 사진 이상의 감동을 선사한다. /런던 내셔널갤러리
그런 드가에게도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10살 연하의 화가, 미국 출신의 메리 커샛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실 만나기 전부터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커샛은 훗날 회고했습니다. “1873년 파리 오스만대로에 있는 한 화랑 창문 너머로 드가의 작품을 처음 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창문에 코를 대고 그 작품에 빠져들었다.” 이듬해 커샛의 작품을 본 드가도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또 있었군.”

1877년, 마침내 43세의 드가와 33세의 커샛이 만났습니다. 실제로 만나 보니 두 사람은 생각보다 더 잘 맞았습니다. 예술을 정말로 사랑했고, 서로의 재능을 존경했으며, 성격과 집안 배경까지 비슷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 곳곳에서 함께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봤다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드가는 커샛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조언해 줬고, 커샛은 드가의 그림을 위해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습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누가 봐도 단순한 친구 이상이었습니다.
메리 커샛(1880~1884). 커샛은 종종 드가의 모델이 돼줬다. 드가는 "내가 여성의 모자와 장식을 잘 못 그리니 연습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정말 그랬을까? /워싱턴 국립 초상화 미술관
그러니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라는 소문이 퍼진 게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드가와 커샛은 “무슨 소리냐. 우리는 절대 연인이 아니다”라며 극구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믿기 어렵지만 이는 사실이라는 게 당시 사람들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붙어 다닌 두 사람이니 연인이라면 아무리 철저하게 숨기려 해도 티가 조금은 날 법 한데, 아주 친한 친구들조차 그런 낌새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거든요. 훗날 기록을 검토해본 미술사가들이 내린 결론도 똑같았습니다.

이런 특이한 관계가 이어졌던 건 두 사람의 성격 탓이 컸습니다. 사실 커샛은 드가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했고 성격이 까다로웠습니다. 예술 외길을 걷는 독신주의자면서 ‘모태 솔로’라는 점까지 똑같았지요.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독립적인 사람이에요. 나는 혼자 일하는 걸 좋아하고, 혼자서도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종합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서로 잘 어울리는 두 남녀가 만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을 버리고 예술에 집중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고, 자존심이 아주 강했으며,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렀고, 무엇보다도 연인이 돼서 서로에게 실망하거나 헤어져서 서로 멀어지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두 사람이 ‘썸’만 탄 건 이런 이유에서다.

미묘한 마음이 스쳐 지나간 자리

무용 수업(1873~1877). 1870년대 드가의 동생이 파산했지만, 다행히도 드가는 이미 인기 화가가 돼 있었다. 드가의 그림 중 가장 잘 팔렸던 건 발레 그림이었다. 드가가 발레 그림을 특히 많이 그린 건 이런 이유에서다.
두 사람이 평생 붙어 다닌 건 아닙니다. 드가와 커샛은 1870년대 후반부터 1880년대 초반까지 5년 넘는 기간 동안 함께 다녔지만, 여러 이유로 조금 거리를 두게 됐습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 처음보다 차분해졌다는 이유도 컸겠지요. 그래도 둘은 다정하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예술적인 동반자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이런 관계는 드가가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1917년까지 계속됐습니다. 드가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묘비에 단 한 문장을 새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드가는 드로잉을 참으로 사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 바랐던 대로 자신의 예술에 집중하며 독신을 고수했고, 미술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예술 측면에서 아마 이들의 판단은 옳았을 겁니다. 드가와 커샛이 결혼했다면 최소한 둘 중 한 사람은 양과 질의 작업을 남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이나 각자의 별난 성격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서로를 원망하며 예술과 사랑 모두를 놓쳤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하지만 서로 조금의 미련쯤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50대의 어느 날 드가는 불쑥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백이면 백, 나는 필요한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한편 커샛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 드가와 나눴던 편지를 모조리 불태워버렸습니다. 왜 그랬는지, 무슨 내용을 비밀로 하고 싶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두 사람의 이런 관계가 얼마나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지, 후대 사람들은 기어이 두 사람이 ‘합작’한 흔적을 밝혀냈습니다. 2014년 미국 워싱턴 내셔널갤러리가 커샛의 대표작 ‘파란 소파에 앉아 있는 소녀’에서 드가의 흔적을 발견한 겁니다. 커샛은 이 작품에 대해 “드가가 많이 도와줬다”고 간단히 기록했지만, 정확히 어느 부분에 도움을 받았는지는 적어두지 않았었습니다.
메리 커샛의 '푸른 소파에 앉아 있는 소녀'(1876).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커샛이 원래 그렸던 선(파란색)과 드가가 고쳐준 선(빨간색). 덕분에 그림에 깊이감이 더해졌다.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의 적외선 분석으로 밝혀졌다.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제공
적외선 검사를 비롯한 정밀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 그림 일부분에서는 커샛의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는 날카롭고 빠른 붓질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드가의 것이겠지요. 또 커샛은 원래 이 장면을 뒷면에 벽이 하나만 있는 형태로 그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드가는 그 벽의 일부를 모서리로 바꿔서 깊이를 더했습니다.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의 킴벌리 존스 큐레이터는 말했습니다. “이 작은 변화 덕분에 꽤 좋은 그림은 걸작이 되었다.”

그림을 한번 볼까요. 파란 소파에 앉아 있는 귀여운 소녀와 강아지. 여느 행복한 가정의 모습 같습니다. 그림 속에서 이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마도 소녀의 부모님이겠지요. 예술이라는 길을 홀로 걸어가기로 굳게 결심한, 하지만 서로를 한없이 아끼는 친밀한 두 사람. 둘은 머리를 맞대고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담긴 이 작품을 그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잠시 교차했던 두 사람의 길은 다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함께 걷는 잠깐 사이에 흘렀던 미묘한 기류는, 이렇게 그림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았네요.

*이번 기사는 DEGAS: His Life, Times and Work (Roy McMullen 지음), Degas: The Artist's Mind (Theodore Reff 지음), 에드가 드가(베른트 그로베 지음, 엄미정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The Art of Rivalry (Sebastian Smee 지음), The Private Lives of Impressionists (Sue Roe 지음)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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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