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렌코의 베를린 필…우아한 에너지·차원이 달랐던 압도감 [클래식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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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 공연'범접할 수 없는 독일 사운드, 완벽한 테크닉, 빈틈없는 호흡'. 독일 명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100년 넘게 세계 최정상급 악단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이유다. 1882년 창단해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아바도 등 전설적인 지휘자들이 이끌어온 베를린 필이 2017년 이후 6년 만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지난 11일 서울 예술의전당은 공연 시작 1시간 30분 전부터 인파로 북적였다. 팬덤을 몰고 다니는 유명 협연자 없이도 이토록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린 건 러시아 출신 명장(名匠) 키릴 페트렌코의 존재 때문이었다. 2019년부터 악단의 열두 번째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을 맡은 인물이자 현시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자로 평가받는 그가 새롭게 만들어낸 베를린 필의 소리를 기대하는 클래식 애호가들이 그만큼 많았단 얘기다.
러시아 출신 명장 페트렌코 지휘
탄탄한 균형 이루며 생기 드러내
현대음악까지 소화…명료한 모티브
담백한 브람스의 서정 드러내
절제의 과정 거쳐 짙은 고독감 표현
첫 곡은 모차르트가 열여덟 살 때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양식을 조화롭게 융합해 쓴 교향곡 29번이었다. 현과 두 대의 오보에, 두 대의 호른이 전부인 편성이지만 페트렌코는 첫 소절부터 각 악기군의 소리를 섬세하게 조율하면서 견고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현의 유려하면서도 경쾌한 음색과 오보에가 만들어내는 명료한 선율, 호른이 펼쳐내는 풍성한 울림은 시종 탄탄한 균형을 이루면서 모차르트 특유의 생기 있으면서도 우아한 에너지를 펼쳐냈다. 이따금 들리는 호른 수석의 실수가 아쉽긴 했으나 그러한 순간에도 전체 구조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다음 곡은 쇤베르크, 말러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현대음악 작곡가 베르크가 1915년에 쓴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개의 작품’. 짜임새나 구성이 극도로 복잡해 자칫하면 난잡하단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작품이지만, 페트렌코가 이끄는 베를린 필은 보통의 악단과 차원이 다르단 걸 제대로 보여줬다. 페트렌코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악구의 흐름을 긴밀히 조형하면서 음악적 긴장감을 서서히 키워냈고, 단원들은 주선율과 배경 선율을 철저히 분리하면서 음향적 입체감을 살려냈다. ‘전주곡’에선 모든 소절의 셈여림 폭과 강세의 정도에 미묘한 차이를 두면서 작품 고유의 격렬한 악상을 드러냈고, ‘원무’에선 빈 왈츠, 렌들러(독일 민속 무곡) 등 주요 모티브를 또렷하게 짚어내면서 신비로운 역동감을 불러일으켰다. 3악장 ‘행진곡’에서 보여준 관현악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절정의 순간 등장하는 해머의 강렬한 울림은 청중을 장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마지막 곡은 베를린 필의 시그니처 레퍼토리 중 하나인 브람스 교향곡 4번. 한평생 그를 따라다닌 베토벤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브람스의 마지막 교향곡이다. 페트렌코는 소문대로 감정에 지나치게 치우치지도, 기교적인 요소만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의 치밀하면서도 명료한 지시에 베를린 필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긴밀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브람스의 처연한 서정이 살아났다. 브람스 작품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짙고 어두운 색채, 감정적으로 휘몰아치는 극적인 효과를 기대했다면 그보다 담백하거나 단조롭다고 느꼈을 수 있으나 연주의 완성도는 최고 수준이었다.
1악장에서 각 선율이 켜켜이 층을 이루며 만들어내는 응축된 소리와 악상을 끊임없이 확장해가며 이뤄내는 단단한 에너지, 마치 선율 간 이음새가 없는 것처럼 긴밀하게 주고받는 호흡은 시종일관 유지됐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4악장. 페트렌코는 작품의 전경과 후경을 담당하는 악기군의 대비를 정확히 짚어내는 동시에 음향의 범위를 서서히 넓혀가면서 비극 속으로 침잠하는 브람스를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새로운 선율이 더해지는 순간마다 아주 얇은 종잇장을 덧대듯 섬세하게 변화하는 소리의 명도와 악상, 단순히 직선적으로 내뿜는 소리가 아닌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밀려 쏟아지듯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거대한 음향은 베를린 필이 왜 세계적인 명성의 악단인지 다시금 깨닫게 했다. 작품의 첫 음부터 이어진 절제의 과정을 거쳐 최후의 순간에 짙게 배어 나오는 브람스의 고독감은 단숨에 밖으로 터져 나오는 단편적인 감정과는 차원이 다른 압도감을 선사했다.리허설을 단 1초도 일찍 끝내는 일이 없다는 페트렌코의 지휘는 누구보다 정교했고, 일말의 과장도 없었다. 그와 베를린 필이 써 내려갈 내일의 ‘음악적 이상(理想)’을 기다리게 할 만한 무대였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