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를 찢으며 덤덤하게 다가오는 칼날… 증오 떨쳐내는 <만분의 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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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옥미나의 아트하우스 칼럼
스포츠의 외연을 입은 칼끝
과거 스포츠 영화들이 경기에서 승리하는 순간 인물의 고민과 갈등도 단번에 해소되는 것처럼 얼버무리기 일쑤였다면, 최근 영화들은 경기장 밖의 인생은 시합의 승패와 무관하게 여전히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하시면서 개인의 삶과 선수의 삶을 공평하게 직조하려고 애쓰는 눈치다.
그런데 개인의 훈련, 믿음직한 동료들의 팀워크, 기록 창출의 드라마를 통해 노력의 숭고함과 인간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스포츠 장르의 만능 공식에서 <만분의 일초>는 한 걸음 비켜나 있다.
그러나 맨손으로 싸우는 대신 무기를 손에 쥔다면 주변 공기의 밀도는 달라질 것이다. 칼이 목을 겨눌 때에도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스포츠로 인식할 수 있을까. 칼을 손에 쥔 스포츠 종목이 둘 있다. 펜싱과 검도. 칼을 쥔 대결이라는 구도에는 여전히 고전적인 결투의 형식이 남아있지만, 상대의 신체를 찌르거나 베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 펜싱은 가볍게 휘어지는 검을 사용하고, 검도는 죽도 혹은 목검을 잡는다.
그래도 보호구와 보호대를 착용하고 선수들이 경기에 임하는 것은 칼에는 여전히 칼의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를 겨누고 있는 칼날 앞에서 마음 흔들리지 않고, 상대를 적이 아니라 선수로 인식하고, 칼끝에서 살기 대신 기술과 기량을 측정하며, 상대의 자세와 호흡에서 공격할 틈을 노릴 것. 그런데 <만분의 일초>는 검도 시합의 상대로 평생 원수로 여겼던 인물을 칼끝 너머에 세운다.
도복처럼 진중하게, 목검처럼 묵묵하게
<만분의 일초>에는 대사가 적다. 두 사람이 어떤 모진 악연으로 얽혔는지 과거의 사연을 설명하는 과정에도 조급함이 없다. 상대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도 제3자에게 짧게 전해 듣는 후일담이 전부다. 타격의 위치와 횟수로 점수를 매기는 게 아니라, 타격의 전후 과정을 살피고 대처의 적절성을 따진다는 – 까다로운 검도의 심판 기준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도 하지 않는다.대한민국 검도 국가대표 최종 선발 과정을 배경으로 도복 차림의 배우들이 내내 목검을 휘두르지만 관객들은 <만분의 일초>를 통해 검도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김성환 감독은 검도와 무도, 명상과 집중에 대해 거창하게 설교할 수 있는 타이밍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김성환 감독은 검도를 소개하고 규칙을 이해시켜 승리의 순간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서사를 설계하는 대신, 팽팽한 분노와 증오를 품은 인물의 긴장과 번민의 순간을 함께 경험할 것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그래서 대련의 순간들은 시간을 클로즈업한 듯 확대되고, 칼날이 허공을 가르기 직전, 만분의 일초쯤 문득 모든 세상이 멈춘 것 같다.
칼날이 되비치는 찰나의 섬광처럼
만일 우리가 오래 묵은 증오와 분노를 떨칠 수 있다면. 만일 우리가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다면. 만일 우리가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면. 그 모든 만일이 이루어지는 순간, <만분의 일초>에는 눈이 내린다. 모든 것이 그대로이지만, 모든 것이 달라 보이는 그 풍경이야말로 ‘만분의 일초’ 혹은 ‘만일’의 진정한 성취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