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딱 30점...리히터의 '얼굴 없는 초상화' 서울에 떴다

에프레미디스 서울 소장품전
내년 1월 6일까지
게르하르트 리히터 '베티'
초상화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 얼굴을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초상화의 중심은 그 어떤 아름다운 배경도, 풍경도 아닌 사람의 얼굴이다. 단 하나, 독일 출신의 현대미술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그린 ‘베티’만 빼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중 하나인 베티의 또 다른 이름은 ‘눈코입 없는 초상화’다. 전세계에 단 30점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진 ‘베티’가 서울행(行) 비행기에 올랐다. 서울 삼성동 에프레미디스 갤러리에서 열리는 컬렉션 전시 ‘디바이드 스카이’에 한 점이 전시되고 있다. 에프레미디스는 올해 5월 서울에 둥지를 튼 독일 갤러리로, 이번 전시를 위해 독일 본사가 소장하고 있는 600여점 중 20여점을 직접 골라 서울로 가져왔다.
전시 전경.
이번 전시의 주제는 베를린과 서울의 만남. 최근 한국을 찾은 에프레미디스 갤러리 설립자 스타브로스 에프레미디스는 “베를린과 서울이 여러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에 착안해 전시를 기획했다"며 “미술 시장으로만 따져도 베를린과 서울은 각각 유럽과 아시아의 주요 '미술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 에프레미디스는 서로 다른 세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나란히 배치했다. 시대와 장소, 문화의 장벽을 넘어선 작가들 간의 유대와 연결고리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리히터처럼 세계가 인정하는 작가부터 이제 막 갤러리스트들의 눈에 든 신진 작가를 한 곳에 세웠다.
Gerhard Richter(게르하르트 리히터), Betty, 2014 Abstraktes Bild (551-6), 1984
이번 전시의 대표작은 단연 ‘베티’다. 이 작품은 리히터가 1988년 자신의 그림을 감상하는 딸의 뒷모습을 그린 초상화다. 사진으로 착각할 정도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살린 작품이다.리히터는 사진을 직접 찍거나 모은 후 캔버스에 투사해 원본과 똑같이 묘사하는 작업방식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여기에 그는 ‘진짜 사진’과 작품의 다른 점을 만들기 위해서 모든 경계를 뿌옇게 묘사하며 그림에 신비로움을 더했다. 마치 사진과 그림의 경계에 있는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베티 바로 옆에는 리히터의 또다른 작품 ‘추상화 551-6‘이 걸렸는데,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하다. 주제가 무엇인지, 무슨 형체를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이렇게 완벽하게 다른 두 작품을 나란히 배치한 것도 갤러리의 의도다. 리히터가 한 가지 작업방식에 갇히는 것을 극도로 거부했던 ‘안티 스타일’ 작가라는 것을 관객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는 사실주의, 추상주의 등 여러 기법을 넘나들면서 활동하고 있다.
Tony Just(토니 저스트), In a Thin voice, 2020
리히터 작품뿐만 아니라 이번 소장품 전시에서는 베를린 이주 후 힘든 시간을 표현한 성 소수자 작가 토니 저스트의 작품 '인 어 씬 보이스'도 함께 소개됐다. 그는 노트에 와인을 흘리고 닫은 후 다시 펼치면 양쪽이 비슷한 무늬를 띄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는 경험과 자신의 성 정체성인 '다름'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작업했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보이는 작품이지만, 자세히 보면 왼쪽과 오른쪽 모양이 똑같이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게 이 작품의 감상법중 하나다.

새우 모양을 한 전등, 담배꽁초가 그대로 함께 놓인 낙엽이 떨어진 나무 설치작품 등 유명 작가의 작품들 외에도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들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상업 갤러리가 준비한 전시인데, 소장품을 팔려고 전시한 게 아니라 미술관처럼 관람객에게 보여주기만 한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전시다. 그것도 무료로. 전시는 2024년 1월 6일까지.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