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베를린 필이라는 '두 괴수'를 만나고 다짐했다. 착하게 살기로
입력
수정
[arte] 이은아의 머글과 덕후 사이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오케스트라는 어디인가요, 라는 질문에 항상 답으로 등장하는 두 악단의 실황 연주를 3일 간격으로 감상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머글이자 덕후로서 정말 귀한 한 주가 아닐 수 없다. 두 오케스트라가 각각 브람스 교향곡 1번과 4번을 연주했으니 브람스 팬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호사를 누렸다.
11월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 후기
'음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철학적 질문 떠올라
6년 전 베를린 필 브람스 4번 듣고
"앞으로 더 성실하게, 더 나은 인생 살겠다" 다짐
음악이란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빛나는 부표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우열은 인생 최대의 난제, 엄마냐 아빠냐, 짜장면이냐 짬뽕이냐에 버금가는 어려운 선택이다. 그 어려운 선택을 해낼 자신이 없다. 그런 선택은 할 수 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연주를 들으니 더욱 명백해졌다. 클덕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음악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두 악단의 시선을 탐구하는 것 그뿐이다.공기를 울려 소리를 내고 소리가 모여 음악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악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연주자마다, 악단마다, 그리고 이 악단을 이끄는 지휘자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에 따라 음악을 빚어내는 방식에 차이가 생기고, 관객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반향의 모습이 달라진다. 우선 빈 필의 답은 “음악 그 자체"인 듯 했다.
투간 소키예프와 빈 필하모닉은 베토벤 교향곡 4번과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연주했다. 프로그램북에 따르면 베토벤 교향곡 4번은 “두 명의 북부 거인 사이에 있는 그리스의 미인"이라고 한다. 다른 누구의 표현이 아닌 자타공인 클덕 음악평론가(!) 로베르트 슈만이 한 말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로맹 롤랑도 이 곡을 “가장 빛나는 순간의 향기를 간직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꽃"이라고 표현했다. 긍정으로 가득 찬 이 곡과 빈 필하모닉의 조합은 찰떡 중의 찰떡이라 기대를 많이 했고 기대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명연이 펼쳐졌다. 첫 음부터 즉시 뿜기 시작한 눈부신 광채는 곡이 끝날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현악기의 윤기 넘치는 황금빛 사운드에 클라리넷, 플륫 등 목관군들이 만드는 생동감이 더해졌고 전 악장 기민하게 활약해 곡에 수많은 입체감을 만든 팀파니 역시 보고 듣는 재미를 선사했다. 음악이란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서 소중한 것, 소중하기에 지켜야 하는 것임을 말하는 듯 했다. 모든 순간이 놀라웠지만 제일 놀라운 건 이 어마어마한 아름다움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심지어 쉬워 보일 정도로 호로록(!) 연주하는 단원들의 모습이었다.
뒤이은 프로그램인 브람스 교향곡 1번은 자주 연주되는 만큼 다양한 해석이 피고 진다. 심지어 빠른 전개, 고뇌의 침잠과 깨달음의 환희를 뚜렷하게 대비시켜 고양감을 극대화하는 구성 등 ‘트렌드'마저 존재한다. 그런데 투간 소키에프와 빈 필하모닉은 그 무엇도 시도하지 않았다. ‘브람스 해석의 근본'이 이것일까, 단 한 프레이징도 과장되게 연주하지 않았고, 극복의 서사도 인위적으로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음악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드라마를 ‘오케스트라'답게 빚어갈 뿐이었다. 앞서 베토벤 교향곡 4번에서 쉼없이 활약한 팀파니스트가 도입부인 거인의 발걸음을 어떻게 표현할지가 궁금했는데 결론적으로는 팀파니 말렛으로, 아니 오케스트라 전체의 소리의 향연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것 같은 기분이었다. “방황하는 머글이여, 심포니란 오케스트라가 다 같이 연주하는 것이라오”라며 전 섹션이 합심해 연주한 도입부 멜로디는 단숨에 관객을 빈 필하모닉의 음악세계에 성공적으로 가둬버렸다. 곡의 백미라고 볼 수 있는 2악장의 바이올린 솔로도 그간 들은 연주 중 가장 큰 볼륨으로 지극히 찬란하게 진행되었다. 무려 30여년간 자리를 지킨 콘서트마스터 라이너 호넥은 “이보시오 머글, 아무리 바이올린 솔로여도 나 혼자만 연주하진 않는다네"라고 말하는 듯 했다. 4악장에서 여느 오케스트라라면 당연히 시도했을 극적인 고양감은 빈 필하모닉에게 불요했다. 그런 속보이는(!) 시도는 처음부터 전혀 없었고 오히려 클라이막스의 순간 한 숨 쉬어가는, 그 찰나의 1초를 멈추는 숨소리마저 브람스 음악의 일부로 만들어 내는 “근본주의"의 시도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4악장의 코다는 환희로 일렁거렸음은 물론이다. 베토벤, 브람스 모두 세상의 수많은 악단들에 의해 수없이 연주되고 해석된 곡이지만 빈 필하모닉이 바라보고, 지키고 싶어하는 음악적 본령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느껴졌다. 300여년을 버틴 음악적 힘의 근원은 무엇인지, 또 앞으로의 수백년간 이 음악을 온전하게 지켜내기 위해 빈 필하모닉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견고한 답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음악 그 자체였다.
작년에 내한한 빈 필하모닉과는 달리 베를린 필하모닉의 내한은 2017년 이후 6년만이다. 새로운 음악감독 키릴 페트렌코와 함께 아주 오랜만에 서울 관객을 찾은 만큼 프로그램에 고심의 흔적이 느껴진다. 모차르트부터 베르크, 브람스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의 장기를 아낌없이 펼쳐내보일 기세다.지휘자 키릴 페트렌코의 비팅은 무서울 만큼 디테일했다. 다양한 손짓으로 아주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왼손으로는 곡의 순간 순간을 연출하는 분위기나 각 섹션별 집중해야 할 프레이즈들을 매섭게 지시했고 바통을 쥔 오른손으로는 곡의 중심을 이뤄야 하는 단단한 철학을 끝없이 환기시키는 듯 했다. 이런 디렉팅은 베르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개의 작품'에서 빛났다. 더블베이스 수석의 웅숭깊은 연주부터 말러 교향곡 6번을 연상시키는 해머 스트라이크까지 이질적인 요소들이 겉잡을 수 없이 뒤엉키는 와중에도 곡은 앞으로 나아갔고 다소 낯선 음악일지라도 극한의 기술이 만나면 충분히 관객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다는 확신이 돋보였다. 쉴틈없이 이어지는 주문을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소화해 엄청나게 집중해 연주하는 단원들, 그들이 바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수가 아닐까 싶을 만큼 대단한 연주력이었다.
캐시미어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사운드로 선보인 브람스 교향곡 4번, 아마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단일 곡으로는 가장 많이 연주된 곡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익숙한 곡이다. 6년전 베를린 필하모닉도 같은 곳에서 같은 곡을 연주한 바 있다. 그 때의 감상 후기를 찾아봤다. “나는 오늘 이 브람스 4번을 들은 내 인생이 헛되지 않도록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살기로 다짐했다”로 시작해 “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로 끝맺고 있었다.6년 전에도 지금도 무대 위의 베를린 필하모닉은 마지막 풀트에 앉은 단원들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진심으로 한 음 한 음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70여명의 개별 연주자들이 각자의 최선을 다해 만들어낸 소리는 너무나 견고하고 온전해 마치 하나의 건축물 같은 완벽한 음악으로 빚어졌다. 특히 2악장 피치카토의 또렷함은 잊을 수 없다. 지나치게 격렬하게 끌고 가지 않은 비탄의 4악장이 마무리될 때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은 시종일관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음악적 컨트롤을 선보였다. 아름다움도, 슬픔도, 고뇌도, 일렁이는 감정도 후회의 물결도 음악 안에 있지만, 어떤 감정적인 답은 내리지는 않겠다는 취지로 들렸다. 그것은 온전히 청자의 몫, 좋은 음악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 맞닿은 그 순간 완성되는 것임을 말하는 듯 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6년전과 지금, 똑같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들으면서 삶의 의미와 인생의 방향에 대해 생각했다. 콘서트홀 한구석에까지 쉼없이 몰아쳐오는 음악의 향연에 허우적거리며 나는 더 겸손한 마음으로 더 성실하게, 더 나은 시간들을 빚어가며 살겠노라 다짐했다. 음악은 무엇이어야 하고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빈 필하모닉은 음악과 예술의 본령을 정의하고 그를 잘 지켜 최상의 상태로 보존하는 것을 선택한 것 같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공학적인 섬세함을 바탕으로 음악을 ‘건축'하고 그 건축물이 삶에 잘 쓰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 ‘괴수' 교향약단의 연주를 연달아 들으며 머글이 내린 결론이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 속에서 음악은 아름답게 빛나는 부표이고, 그 부표에 빛을 나려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두 악단의 단원들에게 꼭 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