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붓 하나 들고 세계를 떠돌며 찾아낸 '시간의 색' [강명희 개인전]

'시간의 색' 회고전 연 강명희 작가 인터뷰

서울대 미대 졸업 후 1972년 프랑스行
韓 여성 작가 최초 퐁피두센터 전시
몽골·남극 등 다니며 '자연의 색' 그려
"그림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순간을 따라가는 것"
강명희 작가 /매그피알 제공
'붓 몇 개와 캔버스만 있다면 언제든,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삶.'

76세 강명희 작가의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1972년 스물다섯 나이에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했다. 1986년엔 한국 여성 작가 최초로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전시를 열 만큼 파리 미술계에서 인정받았다.거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고비사막부터 파타고니아 빙하까지, 그는 계속해서 낯선 곳을 찾아다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경이로운 자연과 야생의 삶은 영감의 원천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서 마주한 시간과 감정을 '색(色)'으로 나타냈다.
서울 성수동 키르서울에서 열린 전시 '시간의 색'에 등장한 그림 50여 점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강 작가가 50여년간 세계를 돌아다니며 탐구한 색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다. 기획은 강 작가와 오랜 기간 인연을 맺은 도미니크 드 빌팽 전(前) 프랑스 국무총리와 그의 아들이 맡았다.

지금이야 성별이 장애물이 되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홀로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는 여성은 보기 드물었다. 무엇이 그를 이끌었을까. 강 작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우연히 보게 된 여행책자가 계기였어요. 프랑스에 살면서 유럽 고전 작품들을 많이 봤지만, 어느 순간 그림의 반쪽만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동양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 무작정 몽골로 떠났어요."
그렇게 떠난 여행은 인도, 중국, 칠레, 남극 등으로 이어졌다. 때로는 사막을 그리기 위해 아예 몽골 현지인들과 함께 지냈고, 때로는 남극 마리안 소만 근처 빙하의 얼음이 떨어지는 걸 그리기 위해 몇날며칠을 가만히 앉아있기도 했다. 그렇게 태어난 그의 그림은 여느 풍경화와는 다르다. 명확한 선 대신 색을 주로 사용한 까닭에 추상화처럼 느껴진다. 거기엔 그 장소의 모습뿐 아니라, 시간과 분위기, 당시 강 작가가 느낀 감정까지 녹아있다.

"파란 하늘과 하얀 담의 색을 계속 보다보면, 하늘의 색과 담의 색이 똑같게 느려지는 순간이 찾아와요. 가슴이 너무 설레고 놀라워서 붓을 잡게 되죠. 내가 결정을 한다기보다 자연스럽게 순간 순간을 따라가며 그림을 그리는 겁니다."
같은 장소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풍경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강 작가는 한 작품에 계속해서 색깔을 덧입힌다. 붓을 완전히 놓기까지 20년 넘게 걸린 작품도 있다. 올 여름 중국 칭다오 서해박물관(TAG)에서 영국 유명 조각가 안토니 곰리와 전시할 때 걸었던 '북쪽 정원'도 처음 그린 지 10년 이상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에겐 '미완성'이다."오랜 시간이 지나 그림을 보다 보면 '그림이 익어가고 있다'는 말이 딱 느껴져요. 내가 그리는 대상이 계속해서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질문을 안겨주거든요. 그게 제가 계속해서 붓을 드는 이유입니다. "
전시는 21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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