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안된다"…스타트업 외면하는 기술유용 지침 현실 [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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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탈취당한 스타트업은 그에 앞서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대기업으로부터 협업이나 투자유치 제안을 받은 뒤, 내부 정보들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올해 다수 업체들에 같은 상황은 반복됐습니다. 부당한 일련의 상황을 막기 위해 법은 존재하지만, 실효성 있게 작동되지 못하는 점이 그 배경으로 지적받고 있습니다. 원인과 해결책을 한경 긱스(Geesk)가 살펴봅니다.
기술 탈취는 올 한해 스타트업 업계를 달군 키워드다. 영양제 디스펜서 업체 알고케어와 롯데헬스케어의 분쟁을 시작으로 인덱스마인(한국투자증권), 스마트스코어(카카오VX), 왓챠(LG유플러스) 등이 연이어 “자사 기술을 뺏겼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대부분 투자 및 협업을 논의했다가 관계가 단절된 뒤, 사업 아이템을 뺏길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 논란을 불렀다.
부당함을 겪었다는 스타트업들은 모두 공정거래위원회를 찾았다. 공정거래법에서 기술의 부당 이용을 막는 시행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업체 중 공정위로부터 유의미한 제재를 끌어낸 곳은 현재까지 없다. 공정거래법상 불공정 거래행위를 판단하는 심사지침이 현실과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외부 전문가를 활용하고, 조사의 적극성을 더해 사장된 지침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마법의 논리' 기술유용, 10년간 조치 '0건'

실제 기술 탈취 여부를 떠나, 심사가 개시도 못 된 상황을 두고 왓챠 내부에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문제가 된 조항은 크게 2가지였다. 공정거래법상 기술유용 조항의 위법성 판단 기준은 정보가 부당하게 유출됐는지, 그리고 유출로 인해 사업 활동이 심히 곤란해졌는지를 따진다. 이때 곤란의 정도는 단순히 매출액이 감소했다는 사실만으론 부족하고, ‘상당히’ 곤란하게 된 점을 입증하라는 문구가 적시돼 있다. 왓챠 측은 “투자나 협업을 위해 접근한 대기업은 대부분 부당 유출은 없었고 자료를 자발적으로 제출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스타트업 입장에선 할 말이 없다”며 “피해의 정도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입증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왓챠는 또 “공정위 측에서 해당 건으로 실제 조치가 이루어진 사례가 없음을 밝혔다”며 “상황은 안타깝지만 조항 자체가 스타트업에 불리한 ‘마법의 논리’라고 표현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공정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공정거래법상 기술유용의 경고 이상 조치는 0건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하도급법(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상 기술유용은 경고 이상 시정조치가 31건이었다. 투자나 협업으로 분쟁이 발생한 경우는 원사업자가 제조, 건설, 수리 등을 맡기는 전통적 하도급(하청)과는 성질이 다르다. 때문에 불공정거래를 막는 공정거래법상 기술유용을 근거로 조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조항이 10년간 작동하지 못한 것이다. 같은 기간 해당 조항으로 정식 접수된 건 역시 28건에 불과하다. 대부분 증거 존재 여부를 따지기 힘들다 보니, 접수에 포함되지 않는 민원회신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경찰과 검찰, 공정위 등 신고에 도움을 주는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에 접수되는 중소기업 기술탈취 상담 건수는 의심·예방 사례를 포함해 1년에 6000건이 넘는다.
"내년에 또 찾아갈 것"…심사 규정 완화 목소리
최근엔 판단에 대한 기대 없이도 공정위를 찾는 창업가들이 늘고 있다. 공정위가 이렇다 할 조치를 내놓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여론전을 펼치기 위한 관문으로 기술유용 심사 신청을 진행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이미 공정거래법상 기술유용 심사가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대부분 인지하고 있다”면서도 “신고를 하고 행위를 외부에 알림으로써 억울함을 덜고 대기업을 압박하는 용도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시행령과 조치 절차는 존재하는데, 현실적인 쓰임은 다른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공정위 측에서도 곤란하긴 마찬가지다. 강제조사권이 없는 공정위가 증거를 확보하기도 어렵다는 원론적 문제도 존재하지만, 해당 심사 조항만으로 기술유용 여부를 명확히 따지기 쉽지 않은 상황도 핵심이다. 하도급법상 기술유용은 법의 취지가 우월적 지위의 남용을 막겠다는 데 중심을 두지만, 공정거래법상 기술유용은 시장의 거래질서 확립에 그 취지가 있다. 스타트업이 기술을 뺏겼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하도급 관계에서의 기술 유용만큼 명쾌하게 판단이 내려질 수는 없다. 구체적인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공정거래법상 기술유용 심사규정 해석에선 더 중요한 셈이다. 그나마 스타트업 기술탈취 관련 조항에 가장 가깝지만, 애초에 스타트업을 위해 생긴 법이 아니기에 생기는 간극이다.
전문가들은 외부 전문가 인력 보강을 주문하고 있다. 조원희 법무법인 디라이트 대표변호사는 “결국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충분해야 유용 사실에 대한 피해를 제대로 분석할 수 있고, 산업계 전문가 인력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경찰보다 공정위가 더 잘 할 수 있는 영역”이라며 “외부 인력과 함께 적극성과 의지를 갖고 심사를 늘려갈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국회 차원에선 심사규정 완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어차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내년에도 새로운 스타트업들이 공정위를 또 찾아갈 것”이라며 “스타트업엔 불공정거래 심사지침을 보다 폭넓게 해석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심사규정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국회의 요청대로 스타트업을 위한 심사지침 개정이 가능할지 조항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