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시 뺨치는 佛 '비밀 작가'...상처받은 젊음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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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숨긴 철저한 '익명의 작가'나이도, 진짜 이름도, 현재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화가가 있다. 데이비드 라피노로 '불리는' 작가 이야기다. 프랑스 태생인 것 외에는 공개된 정보가 없다. 데이비드 라피노가 작가의 본명인지도 알 수 없다. 그 어떤 언론도 그를 만난 적이 없으니…. 하긴, 그가 소속된 미국의 갤러리조차 그와 직접 대면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만날 수 있는 방법도 모른다고 한다.
데이비드 라피노 개인전 '스페셜 K'
2024년 1월 13일까지 글래드스톤갤러리
'베일에 쌓인 작가’ 라피노의 작품 15여점이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 상륙했다. 서울 삼성동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스페셜 K’에서다.인스타그램과 텀블러 사이트 등 온라인을 통해 그림을 선보인 그는 그 어떤 ‘후광효과’ 없이도 스타가 됐다. 인스타그램에서는 7만 명이 넘는 팔로어가 그의 작품활동을 지켜본다. 202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그는 유럽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갤러리 등 미술계를 넘어 음악, 패션업계까지 그에게 협업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내놓는 그림마다 ‘완판’됐다. 이번 전시에 걸린 작품들도 공개와 동시에 대부분 주인을 찾았다.그의 작품 속 모델이 된 젊은 청년들은 모두 어딘가 공허한 표정을 짓는다. 눈빛에 초점이 없다. 그래서 라피노의 작품에는 “외설적이다, 퇴폐적이다”란 평가가 뒤따른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라피노가 그린 건 외설이 아닌 이 시대의 얼굴"이라고 해석한다. 라피노는 요즘 젊은이들을 그린다. 그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청년들이 꿈을 포기하거나 비뚤어지는 과정을 그림으로 묘사한다. 담배를 피우거나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린 그림 속 청년들의 머릿속에 담긴 단어들은 충동, 쾌락, 욕망이 아닌 무관심, 허무, 상처란 설명이다. 라피노의 작품 대부분은 알 수 없는 구도로 인물과 풍경이 찌그러져 있다. 그는 굴곡된 렌즈를 통해 보는 세계를 종이 위에 옮겼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열쇠구멍으로 몰래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라피노는 굴곡진 구도를 이용해 우리 모두가 알지만 모른 척 하는, 사회가 숨기는 ‘문 뒤의 이야기’들을 말한다.
이번 전시에 걸린 작품은 그가 작년과 올해 붓질한 것들이다. 1년 사이에 변한 그의 작업방식을 들여다 보는 것도 감상 포인트다. 2022년 작품에 들어있는 인물과 풍경은 평면에 가까웠지만, 올 들어선 광각렌즈를 들이댄 것처럼 3차원으로 표현했다. 형식은 만화와 비슷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하나같이 묵직하다. 사회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소속된 사람과 풍경도 왜곡될 수 밖에 없다는 것.뱅크시와 비슷하지만, 라피노는 자신이 누군지 힌트조차 안 줬다는 점에서 조금 더 철저한 ‘익명 작가’다. 그는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아무런 설명 없이 오직 작품으로만 얘기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론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닌 작가의 이름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으니까. 전시는 2024년 1월 13일까지.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