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여의도 비행장에 내린 김중업, 잿더미의 조국에서 그의 시대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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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성문 밖 첫 동네 (22회)
-프랑스대사관 2: 스승과 제자, 시대를 건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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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업은 김수근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1970년 4월, 대통령 박정희와 서울시장 김옥현의 무리한 욕심으로 비탈 위에 세운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그해 8월 졸속 추진한 '철거민 이주' 때문에 발생한 ‘광주 대단지 사건’ 관련해 정부의 주택 정책을 질타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하고 박정희의 미움을 사게 된다. 결국 3개월짜리 단수 여권으로 해외로 강제 추방된다. 고향에 돌아올 수 없는 국적 불명자가 됐다가 1978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작품 수가 김수근보다 적은 이유이다.
그가 한국의 주목할 만한 건축가가 된 것은 스승의 영향이 컸다.한국전이 한창인 1952년, 부산에서 이중섭을 비롯한 예술가들과 다방을 전전하던 김중업은 '한국예술단체 총연합회’의 추천으로 베니스 ‘세계 예술가대회’에 참석한다. 김소운, 김말봉, 오영진, 윤호중과 부산의 수영비행장에서 수송기에 올라 4일 만에 베니스에 도착한다. 각국의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인류의 미래에 관해 토론하는 세계적인 행사였다. 전쟁이 한창인 가난한 나라의 예술가들, 그곳에서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김중업은 행사장에서 프랑스 대표로 참석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년~1965년)를 만난다.
미술학도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건축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1926년에 근대 건축의 5원칙이라 불리는 도미노 이론(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수평 창, 자유로운 파사드)을 완성했다. 도미노는 집을 뜻하는 도무스 domus와 혁신을 뜻하는 이노베이션 innovation의 합성어이다.
당시에는 건축물을 중세 시대의 육중한 건물, 벽돌로 짓는 집으로만 생각했다. 그가 착안한 것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였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는 전쟁에서 이겼지만 나라는 잿더미였다. 쉽고 빠른 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니 1층에 필로티를 만들어 건물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벽도 내력벽이 아닌 자유롭게 평 유리로 대체할 수 있었다. 굳이 외벽이 건물을 지탱하지 않아도 되니 평면의 배치도가 달라졌다. 옥상에는 정원을 만들어 사람들이 쉬거나 차를 마실 수 있게 했다. 건물은 쉽고 빠르게 지어졌고 인간 중심의 집이 되었다. 이는 혁명이었다.
김중업은 베니스의 예술가 대회에서 르 꼬르뷔지에를 처음 만난 후 무작정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제자가 됐다. 가난한 나라 청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3년여 개월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이다. 그는 건축사무소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직원이었다. 김중업이 1956년 2월 여의도 비행장에 내릴 때 조국은 아직도 잿더미와 다름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시대가 된 것이다.
김중업의 건축 세계는 르 꼬르뷔지에의 제자가 되기 전과 후로 나뉜다. 본인의 회고와 같이 작품에 한국의 얼을 담으려고 애썼고 프랑스 대사관은 자신의 작품 세계에 하나의 길잡이가 되었다고 한다. 스승에게 배운 형태, 공간적 디자인에 머무르지 않고 그 바탕에 한국적 미학을 더해 만든 작품이 프랑스대사관이다.르 꼬르뷔지에는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 잿더미가 된 유럽을 재건했고 김중업은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우리의 건축을 일으켰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세상을 바르게 개혁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미술의 강을 건너 건축에 도달한 거장, 스승의 가르침 위에 한국적인 선(善)을 입힌 김중업.
김중업은 부산 피난 시절 아내 남덕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힘들어하는 이중섭을 위해 국제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이중섭에게 "왜 바보 같이 눈물만 흘리냐"고 말하며 함께 울었던 사람. 그의 휴머니즘도 건축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원천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