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 박서보 작품 볼 때는 라흐마니노프 '바다와 갈매기'가 제격

[arte] 이수민의 커넥트아트
박서보 화백의 생전 마지막 개인전

지난달 중순, 클래식 강연을 위해 방문한 부산에서 박서보 화백의 마지막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조현화랑을 찾았습니다. 92세로 생을 마감한 박서보 화백의 부고가 발표된 지 이틀 후였습니다. 아직 생기를 품은 담쟁이로 뒤덮인 담과 반원을 그리는 돌계단이 낭만적인 조현화랑의 육중한 쇠문을 힘주어 열었습니다. 갤러리 입구 나무 테이블 위에는 고인을 기리는 흰 국화가 소박하게 몇 송이 뉘여져 있었는데 무방비 상태로 발을 들인 입장객의 마음을 툭 건드렸습니다.
박서보 화백의 손자 박지환의 비디오 아트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박서보 화백 손자 박지환의 비디오 아트가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캔버스 위 한지의 질감을 가늠해볼 수 있을 만큼 크게 확대되고 다시금 축소되는 영상은 시각적 변주를 주며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스크린 양쪽에 놓인 스피커에서는 파도 소리처럼 들리는 몽환적인 배경음이 흘러나오며 감상에 즉각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했고요.

스크린에서 몇 발짝만 옮기면 비디오 아트의 원본인 1000호 크기의 <묘법 No.100928>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스크린에서는 화가의 세세한 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 실제 작품에서는 크기에서부터 느껴지는 압도감이 인상 깊었습니다.
조현화랑 이층 전경
2층에는 1986년에 중단했다가 다시 그린 ‘연필 묘법’ 신작들과 공기색, 단풍색, 홍시색 등 자연의 색을 옮겨놓은 ‘색채 묘법’ 작품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던 화백은 수행의 도구로써 그림을 그렸다고 말합니다. 두 달간 물에 불린 한지를 캔버스 위에 붙이고, 한지가 마르기 전에 굵은 연필로 기준선을 그리고, 반복되는 선 긋기로 인해 젖은 한지가 죽죽 밀려 이랑을 이루게 되는 그의 작품 제작 기법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의 가치는 남과 다른 것에서 나온다’라고 했던 화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박서보 화백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박서보 화백은 폐암 3기임에도 ‘항암치료를 할 시간에 그림 한 장을 더 그리자’라는 마음으로 항암치료를 거부했습니다. 또한 완치가 불가능한 파킨슨병을 겪으며 점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육체를 정신력으로 붙들어 매고 떠나는 순간까지 연필과 붓을 놓지 않았죠. 과연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는 별명과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박서보 화백의 작품과 어울리는 음악들

시인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이런 구절이 나오죠.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비슷한 맥락으로 작가들의 붓터치 하나 하나, 연주자들의 몸짓 하나 하나에는 수많은 땀방울과 치열한 고민이 묻어 있기 마련입니다.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연습곡 Op. 39-2> ‘바다와 갈매기’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은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에 피아노 독주곡들에서 그의 역량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총 9곡으로 이루어진 <회화적 연습곡 Op. 39>은 각 곡마다 피아노로 구현할 수 있는 테크닉이 꽉꽉 눌러 담겨져 있지만 연주자의 풍부한 상상력과 표현력 또한 요구되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바다와 갈매기’라는 부제가 붙은 <회화적 연습곡 Op. 39-2>는 어두운 밤, 더욱 깊어 보이는 수면 위를 홀로 날아다니는 갈매기가 연상됩니다. 왼손은 건반을 무겁게 옮겨 다니며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오른손은 쇼팽의 피아노 독주곡처럼 왼손의 단순한 음형 위를 자유롭게 거닙니다. 음표를 밀고 당기는 정도에 따라, 쉼표와 늘임표를 얼마나 길게 지속하는지에 따라 달리 들리는 곡입니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
박서보 화백의 회화가 손자의 비디오 아트로 재탄생한 것처럼 한 개의 테마를 최대한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음악 장르를 ‘변주곡’이라고 합니다. 피아노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유명한 변주곡이라면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을, 바이올린 레퍼토리 중에서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곡은 영화 <올드보이>에도 삽입되어 귀에 익숙한 테마 멜로디가 짧게 등장한 후 12개의 변주가 펼쳐집니다. 일 초를 몇 개로 쪼개는 재빠른 활 놀림이 필요하기도, 1mm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섬세한 음정이 필요하기도, 왼손가락과 활을 쥔 손가락으로 동시에 현을 튀기며 현란함을 발휘해야 할 때도 필요한 이 곡은 극악무도한 테크닉 때문에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애증을 품고 있는 곡이기도 합니다.
부산 달맞이 고개에 위치한 조현화랑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