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베덴의 '쇼스타코비치 5번' 피날레에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arte] 임성우의 클래식을 변호하다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의 상임지휘자로 부임하는 츠베덴이 지휘하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연주가 있었습니다.
이날 공연의 1부 프로그램은 하이든의 '옥스포드' 교향곡이었지만 위의 포스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 공연의 주된 관심사는 아무래도 2부의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이었습니다.그 동안 츠베덴이 서울시향 등 국내 오케스트라와 몇 차례 가진 공연에서 그가 오케스트라를 상당히 능수능란하게 잘 다룬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츠베덴은 서울시향과의 연주에서 상당히 투명한 음향 밸런스와 함께 근육질이 느껴지는 굴곡 있는 오케스트라 음향을 만들어 내었고 그의 다이나믹한 곡 해석 또한 (곡에 따라 호불호가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상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이날 공연의 1부는 하이든의 교향곡 92번 '옥스포드'로 시작하였습니다. 앞에서 설명 드린 츠베덴의 지휘 스타일에 비추어 이날 프로그램의 핵심인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과는 궁합이 아주 좋을 것이라는 예상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습니다만, 그의 스타일이 1부의 하이든 교향곡과 과연 잘 맞을까 하는 점에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는데, 막상 1부의 하이든의 '옥스포드' 교향곡은 츠베덴과 의외로 상성이 좋았습니다.
고전적 우아함을 자랑하는 하이든의 교향곡에 근육질을 입힌 지휘자로는 아르농쿠르를 들 수 있습니다. 생전에 그가 남긴 '옥스포드' 교향곡은 마치 이 곡이 하이든의 곡이 아니라 베토벤의 곡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도발적인 연주였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 그 신선함은 완전히 퇴색되지는 않았습니다.아르농쿠르 옥스포드 교향곡


츠베덴의 지휘 스타일상 오늘 1부 프로그램의 '옥스포드'가 혹시 아르농쿠르와 비슷한 결일 수도 있겠다는 행복한 상상을 미리 해보았는데, 아쉽게도 아르농쿠르만큼 과감한 음악적 해석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츠베덴은 느린 서주에 이어 알레그로-아다지오-알레그레토-프레스토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고전 교향곡의 템포의 균형 감각을 절묘하게 유지하면서도 자칫 평범하고 지루하게 연주될 수도 있는 이 곡을 다채로운 표정으로 맛깔스럽게 잘 표현해냈다는 생각입니다.이 교향곡은 원래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된 곡을 확대 편성한 곡인지라 실내악적 특성이 강한데, 현악기 주자 출신인 츠베덴은 정교한 아티큘레이션과 함께 빈풍의 향취가 느껴지는 단정한 해석을 기반으로 오케스트라와 절묘한 밀당을 즐기는 듯했습니다. 츠베덴은 지휘 동작이 워낙 절도가 있지만 가끔씩은 (예를 들어 미뉴엣 악장에서 비올라 파트가 부각될 때와 같이) 부분 부분 강조점에 따라 몸과 시선이 매우 음악적으로 움직여서 이를 보며 듣는 직관의 재미가 있었습니다.

사실 하이든의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곡과는 달리 화장하지 않은 생얼같이 현악의 질감이 그대로 노출되는 곡인데, 이날 서울시향의 연주에서는 악장을 비롯한 바이올린 파트의 소리가 좀 덜 경직되고 부드러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만, 이는 빈필 등 최근 내한한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의 소리에 우리 귀가 스포일된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화려한 장식 치장과 또 과도한 음향적 수사를 걷어낸 (마치 그윽하게 우려낸 차와도 같이) 단아하면서도 그 이면에 매우 창의적인 음악적 시도가 담긴 하이든의 교향곡은 2부의 쇼스타코비치를 향한 멋진 워밍업이기도 하였습니다.이어진 2부의 쇼스타코비치 5번 교향곡은 예상했던 대로 (젊은이들의 표현을 빌자면) "찢고 불태워버린" 대단한 연주였습니다.

이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15개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곡이지만, 작곡가가 이 교향곡에 담고자 하였던 바에 관하여는 오해와 논란이 많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가 오페라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으로 인해 스탈린의 눈밖에 나 정치적 숙청이라는 절대절명의 위기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로 "당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현실적이고도 창의적인 답변"이라는 부제와 함께 발표한 곡입니다. 그의 작품을 힐난하던 당국은 이 교향곡에서 작곡가의 자아비판을 읽었는지 그 후 쇼스타코비치를 더이상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이 작품은 한 예술가가 독재자의 압박에 굴복하여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체제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아낸 어용 작품인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특히 이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였는지 이 곡에 '혁명'이라는 부제를 붙이면서 환희에 가득찬 피날레에 흥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교향곡의 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산주의 정권의 지배 하에서 음악가로 살아 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한 천재 소비에트 예술가의 고뇌의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츠베덴은 비극적 사랑을 그린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하바네라에서 차용한 동기로 시작하는 1악장의 첫 울림부터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날카로운 표현으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멋진 출발을 하였습니다.

특히 중간에 미케니컬한 피아노의 울림을 시작으로 금관을 중심으로 곡이 마치 군대의 행진곡처럼 전개되며 광포한 클라이막스에 이르는 장면에서의 츠베덴의 선이 굵은 처리와 탁월한 음향 감각은 상당히 압도적이었는데, 이런 류의 음향은 오디오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겠다 싶더군요.

2악장은 언뜻 보면 봄날과 같이 화사하고 밝은 분위기의 곡이지만 후일 쇼스타코비치는 이 2악장에 대하여 “마치 어떤 사람이 당신을 몽둥이로 때리며 ‘네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 네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나 행진하며 ‘우리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라고 중얼거린다.”라고 언급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츠베덴이 만들어낸 2악장은 음악의 이면에 담긴 그러한 신랄한 맛이 다소 덜 느껴져 바이올린 솔로를 포함 군데군데 루바토를 좀 더 강조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서울시향의 연주만큼은 기능적인 면에서 상당히 안정되어 있는 데다가 조율된 음향이 기대 이상으로 세련되어 듣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이어진 3악장은 러시아 민중들에게 익숙한 코랄 선율로 시작하는데, 중간에 (마치 죽은 영혼들이 아지랭이처럼 피어나듯) 바이올린이 트레몰로로 움직이는 그 위로 오보에에 의해 탄식의 노래가 연주되기 시작하고 이어서 트라이앵글이 마치 죽은 영혼을 각성시키듯 울리자 오케스트라가 첼로 등 저현에서 동요를 일으키며 현악기의 주도에 의해 클라이맥스로 올라갑니다.

그 때 (마치 죽은 영혼들이 거세게 일어나듯) 현악기가 격렬한 트레몰로를 연주하는 위로 자일로폰의 가세와 함께 저음현이 거세게 울부짖는데, 정말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서울시향의 저음현이 이렇게 좋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원들 또한 몰입감이 극대화된 연주를 들려주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프가 다시 울리고 그 하프와 함께 첼레스타가 매우 여리게 탄식의 노래를 부르자 약음기를 낀 현악기가 마치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듯이 (진혼미사의 축복송 Benetictus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화음을 조용히 연주하면서 그렇게 3악장은 끝이 났는데, 초연 당시 청중들은 이 악장을 통해 작곡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눈치챘던지 3악장이 연주되는 동안 소리내어 우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공공의 장소에서 우는 것조차 사회주의적 이념에 반하는 것으로 단죄되었던 시절이었지만, 한 예술가의 예술혼이 담긴 이 위대한 음악 앞에서는 그들도 어찌할 수 없었을텐데, 이날 츠베덴이 3악장 마지막에 빚어낸 하프의 하모닉스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처럼 리얼하고 아름다왔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4악장! 이 악장의 경우 특히 그 음악적 내용에 대하여는 논란과 오해가 적지 않은 악장입니다. 초연 당시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매우 낙관적인 감정의 고양과 사회주의의 승리를 묘사한 것처럼 평을 하였고 언뜻 피상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4악장은 그와 정반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4악장은 쇼스타코비치가 이 교향곡을 작곡하기 몇 달 전에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의 '부활(Rebirth)'이라는 제목의 시에 곡을 부친 가곡에서 음악적 소재를 차용한 것입니다(아래 동영상 참조).

부활 (푸시킨)

야만적인 예술가가 나태한 붓으로
천재의 그림에 검정칠을 입힌 후
자신의 엉터리 그림을 그 위에
함부로 그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낯선 색깔들은
낡은 허물처럼 떨어져 버리고
천재의 작품은 다시 우리 앞에
예전의 아름다움으로 살아난다
그렇게 망령은
내 고통받는 영혼으로부터 사라지고
그 속에 본래의 순수한 날의
모습들이 다시 살아난다.



쇼스타코비치의 위 가곡은 진정한 예술은 야만적 파괴행위를 이기고 결국 드러난다는 내용인데, 당시에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던 이 가곡 작품에서 이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의 핵심 음악적 소재를 차용함으로써 쇼스타코비치는 그 서슬퍼런 압제의 시대를 고발하는 자신의 메세지를 곡에 몰래 담았던 것입니다.

츠베덴은 시작부터 번스타인과 같이 매우 빠른 템포에 의해 맹렬한 기세로 곡을 광포하게 몰아 갔는데, 폭압적인 분위기의 도입부 끝 부분의 금관이 다소 조급하여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지만, 전체적인 울림은 너무나 강렬하였습니다.



그 후 현악기의 여리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음을 배경으로 호른이 노래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은 위의 푸시킨의 시 "부활"의 나머지 부분, 즉 "시간이 흐르면 그 낯선 색깔들은 낡은 허물처럼 떨어져 버리고, 천재의 작품은 다시 우리 앞에 예전의 아름다움으로 살아난다. 그렇게 망령은 내 고통받는 영혼으로부터 사라지고 그 속에 본래의 순수한 날의 모습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노래에 대한 반주 음형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그 후 타악기의 조용한 울림으로 곡은 마무리로 접어드는데,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A음이 집요하게 (8분음표로 252번이나) 반복되면서 긴장을 조성하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오케스트라 전체의 긴장이 고조되다가 심벌즈와 함께 승리의 팡파레와 같은 외침이 울려퍼지는데, 이러한 장쾌한 피날레는 외견상 이전까지의 어둡고 비관적인 분위기를 완전히 일신하면서 매우 낙관적이고 환희에 가득찬 듯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레너드 번스타인과 같은 서방의 많은 지휘자들 또한 이 교향곡의 마지막 피날레를 그와 같은 취지로 받아 들여 매우 빠른 속도로 피날레를 연주하면서 (아래 동영상 2:08 이하 부분에서 번스타인의 얼굴 표정에서 읽을 수 있듯이) 매우 경쾌한 해피 엔딩처럼 곡을 마무리하기도 하였습니다.

번스타인


그러나, 이러한 빠른 피날레 처리는 쇼스타코비치가 악보에 기재한 것과는 아주 상반되는 내용입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코다 부분의 템포를 8분음표=188로서 악보에 기재하였는데, 이는 매우 느린 템포입니다. 통상 해피엔딩의 곡을 작곡할 경우 템포 또한 (위의 번스타인의 연주 속도와 같이) 매우 빠르게 지시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인데, 쇼스타코비치가 이렇게 느린 템포를 기재한 것은 어떤 연유일까요?

쇼스타코비치는 훗날 이 교향곡에 담긴 환희는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에서처럼 강요된 즐거움일 뿐 결코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쇼스타코비치는 비록 음악가로서 생존을 위해 부득이 이 곡의 피날레를 겉으로는 낙관적인 것처럼 꾸몄지만,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느린 템포를 채택함으로써 이 피날레가 결코 사회주의 정권의 미래에 대한 낙관과 긍정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에 따른 거짓 감정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템포 설정 뿐만 아니라, 이 4악장의 마지막 엔딩의 팡파레에서 쇼스타코비치는 b natural 대신 b flat을 선택함으로써 곡이 장조가 아닌 단조로 마무리되도록 하였습니다.

18세의 나이로 당시 번스타인이 이끌던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 허바우의 악장으로 활약했던 츠베덴이기에, 그도 이날 연주에서 과연 번스타인처럼 화려하고 낙관적인 피날레를 선택할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츠베덴은 이 피날레를 번스타인과 같이 빠른 템포로 몰아부치며 낙관적 결말을 강조하는 대신에 매우 신중한 템포로 무겁게, 그러나 그래서 더욱 강렬하게 곡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코다에서 좀 더 무겁게 한 음 한 음을 더 강조하였으면 하는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츠베덴의 이 피날레 빌드업은 정말 말문이 막힐 정도로 대단하였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거립니다.

이 곡의 초연을 들었던 당시 러시아 청중들은 소리내어 울면서 연주시간보다 더 긴 기립박수를 쇼스타코비치를 위해 보냈다고 합니다. 모르는 몰라도 그들 중 많은 이들은 분명 이 교향곡에서 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깊은 고뇌를 읽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그들 또한 푸시킨의 시 "부활"과 같이 결국은 야만인의 망령은 사라지고 원래의 순수한 날이 도래하여 천재의 작품이 사람들 앞에 예전의 아름다움으로 다시 살아나기를 마음속 깊이 갈망하였는지도 모릅니다.이날 롯데콘서트홀의 청중들이 이 곡과 그 마지막 피날레에서 이 교향곡 이면에 담긴 한 예술가의 처절한 영혼의 몸부림과 고뇌를 얼마나 느끼며 공감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객석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에 대해 어느 때보다 열광적인 환호로 응답하였고, 츠베덴과 서울시향은 그러한 뜨거운 박수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