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칼럼] '시대부조화' 정치 86이 여전히 판치는 현실
입력
수정
지면A30
지난 20년간 '민주화' 숙주 삼아86(80년대 학번, 60년대생)들이 정치판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다. 송영길·이인영·임종석 등이 ‘세대교체’ 명분을 업고 이때 등판했다. 4년 뒤 86 운동권은 당시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 71%를 차지할 정도로 기세등등했다. 이후 20년 동안 이들은 정치판에서 철옹성을 구축했다. 총선별 당선자 비율을 보자. 86세대가 본격 정치권에 입문한 2004년 17대 총선에서 이들의 주 연령층인 30~40대 당선자는 107명(지역구 기준, 30대 23명, 40대 84명)으로 4년 전 총선 때 같은 연령층 당선자보다 1.5배 이상 많았다. 86세대가 50대가 된 2020년 21대 총선에선 이 연령층 당선자는 157명으로, 이전의 다른 총선 때 50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더불어민주당과 그 위성정당을 포함해 183석 가운데 절반 가까운 80여 명이 86 운동권 출신이다.
독식 사슬 구축, 정치판 장기 집권
돈봉투 사태·암컷 발언 등 불구
무오류성 유물에 갇혀 '내로남불'
국민 요구 다양화·분화하는데
아직 독재와 싸운다는 86 청산을
홍영식 논설위원
전임 정부 땐 대통령 비서실장과 수석, 장관을 꿰찼고, 당 대표와 원내대표, 광역단체장을 줄줄이 거머쥐었다. 86세대가 지난 20년간 정치판 주류로 득세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이철승 서강대 교수가 정확한 분석을 내놨다. 다른 세대와 비교할 수 없는 네트워크의 응집성이다. 운동권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은 비슷한 집합적, 문화적 정체성을 갖고 연중무휴로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으며, 지연과 혈연 학연을 뛰어넘는 이념 네트워크로 뭉쳐있다. 이런 단단한 기반을 다진 뒤 권력의 중심에 들어와 그들만의 독식 사슬을 만들어 그간 숱한 퇴진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이들의 정치 행태를 보면 세대교체는 허구다. 계파·계보에 빌붙은 것은 약과다. 민주화를 자신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기고 보상까지 요구하는 철면피를 보였다. 타인의 도덕성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자신들에겐 한없이 너그럽고, 끼리끼리 방어막을 쳐주는 이중성 사례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김민석은 돈봉투 사건과 관련, 송영길에 대해 “물욕이 적은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다. 5·18 행사 전날 광주 룸살롱에서 동료 86 여성 정치인에게 입에 담기 힘든 욕지거리를 한 게 드러났지만,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았다. 거악과 싸우는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선 너그러워도 된다는 운동권 특유의 ‘무오류성’ 유물에 갇힌 결과다. 룸살롱 작태와 최강욱의 암컷 발언은 86 운동권의 남성중심주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전직 수행비서가 폭로한 안희정의 ‘철옹성 같은 의전’도 끝없는 위선의 속살을 잘 보여준다.
우상호는 2021년 서울시장 선거 경선에서 반전세 사는 찐 서민이라고 했다. 송영길도 최근 한동훈 법무장관은 타워팰리스에 살고 자신은 4억3000만원 전세에 산다고 했다. 욕심 없이 민중을 위해 헌신한다는 운동권 품성론과 맞닿아 있지만, 5선 의원과 인천시장을 지내며 20년 넘게 억대 연봉을 받아온 사람의 허위 의식일 뿐이다. 송영길은 한 장관을 향해 어린놈 운운했으나 30대에 의원 배지를 달고 40대에 인천시장을 한 자신은 뭔가. 86들이 30~40대에 의원, 장관할 때는 변화의 바람이고, 남이 하니 어린놈이라고 한다. 세상이 온통 자기중심주의다.
송영길은 대통령을 향해 “이 나라를 위해 뭘 했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기를 했나”라고 했다. 운동권의 선민의식이다. 민주화 운동을 자신들의 독점자본인 양 여기지만, 민주화는 사회 저변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며 꼬박꼬박 세금을 낸 국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민주화를 그들만의 훈장으로 여기며 운동권 귀족으로 누릴 건 다 누렸다. 주사파와 같은 종북 좌익이 어떻게 민주화와 동의어일 수 있나. 도덕적 파탄을 내놓고도 송영길 신당, 조국 신당 얘기마저 나오고 불법혐의자 를 떠받든다. 정당을 개인의 명예 회복 수단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제 86이 남긴 긴 어둠의 끝자락을 잘라내야 한다. 과거 운동권에 몸담았던 함운경 주대환 민경우 등은 “우리가 만든 쓰레기는 우리가 치우자”고 했다. 물론 86이라고 도매금으로 싸잡아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민 요구는 다양화하고 분화하는데, 독재라는 허상을 붙잡고 싸우고 있다고 하고, 도덕적이지도 진짜 민주적이지도 않은 ‘시대 부조화’한 86들이 여전히 판치는 모습은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