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하면서 배운다더니… 눈물 콧물 쏙 빼놓은 ‘박틀러’ 닮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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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강선애의 스무살 하콘 기획자 노트대학생 때의 일이다. 하콘 스태프(현재는 ‘하코너’라고 부른다)로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콘의 관객에게 안내메일을 보내는 중요한 임무가 맡겨졌다. 그동안 몇 명의 메일지기를 거쳐 내게로 온 그 임무는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당시로서는 다소 파격적인 인사였다.
지금이야 SNS 등을 통해 간편하고 빠르게 공연을 알릴 수 있지만, 당시의 안내메일은 유일한 하콘 발 소식이자 중요한 홍보 수단이었다. 메일지기들이 각각 자신만의 스타일로 써 내려간 하콘의 이메일은 때로는 장문의 편지이기도 했고, 때로는 간결한 에세이기도 했으며, 글과 함께 사진이나 음악을 전하기도 하면서 하콘 만의 색깔을 만들어왔다. 한 달에 두세 번, 정기적으로 이메일을 받은 관객들은 종종 잘 읽었다는 회신을 해주었다. 공연을 보고 나면 이메일로 정성 어린 후기가 도착하기도 했고, 안부 인사가 당도하기도 해 이에 대한 회신을 주고받는 것 역시 메일지기의 역할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중요한 임무의 무게감을 나는 잘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새로운 메일지기로서의 첫 번째 메일발송을 앞둔 어느 연말, 초고를 박창수 선생님께 보내고 친구 집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을 만끽하고 있던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 너머로 차가운 불호령이 떨어졌다.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당장 다시 써!” 일단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중에 수정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나는 결국 풀이 죽어 곧장 집으로 기어들어 왔다. 글의 구조, 담긴 메시지, 메일의 디자인 등 무엇 하나 지적 받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도 부끄러움은 점점 ‘처음인데 잘 못할 수도 있지’, ‘휴일에 이렇게까지 혼나야 하나?’ 같은 서러움으로 바뀌어 갔다. 처음에는 안내메일 그 자체만으로 조목조목 이야기하시던 선생님도 전화를 받는 내 태도에서 감지하셨는지 결국 사납게 몰아붙이셨다. 눈에서는 눈물이, 코에서는 콧물이 흘러내려 턱에서 만난 물줄기가 책상 위로 뚝뚝 떨어졌지만, 한 고집하는 성격 탓에 단 한 번 훌쩍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불호령은 계속됐다. 그럴 때마다 똑같이 눈물 콧물 다 짜내던 나는 훌쩍거리는 대신 ‘’올해까지만 할 거야’, ‘이 프로젝트 끝날 때까지만 할 거야’하면서 스태프 활동의 종료 시점을 지금이 아닌, 먼 미래로 설정해 두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또 그 기한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한 해 두 해 미뤄졌고, 좀 더 시간이 지나서는 설정 자체가 의미 없어졌다.
그 이유를 나는 안다. 어린 내가 혼이 난 대부분의 이유는 태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프로정신으로 꼼꼼하게 하기를 바라셨던 선생님은 첫 번째 이메일의 발송일 직전이 되어서야 초고를 보낸 나의 어리숙함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나태함을 나무라셨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처럼, 그 작은 하나의 중요성을 쉼 없이 가르치셨고, 자원봉사이니 적당히 만족하자는 법 없이 각자가 끊임없이 공부하고 발전하기를 요구하셨다. 특히 깊게 고민하고, 책임감 있게 해내는 태도가 보이지 않으면 여지없이 불벼락이 떨어졌는데, 평소에 말이 많지도, 목소리가 크지도 않은 선생님의 불벼락은 마치 화려한 불꽃쇼처럼 화르륵 타오르는 반전이 있었다.누군가는 그 불꽃쇼를 못 견뎌 일찌감치 그만두기도 하고, 누군가는 지금까지도 하콘 곁을 지키고 있지만, 아마 이곳을 거쳐 간 모든 이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애정어린 가르침이었는지를. 그런 우리는 선생님을 ‘박틀러’라 불렀다. 책임감과 프로정신이 기본이라 요구하는 박틀러는 자기 자신에게는 더욱 엄격했다. 21년간 하우스콘서트가 단 한 번도 그 흐름이 끊이지 않은 데에는 그 엄격함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조차 하콘의 진행을 위해 외출증을 끊고 공연에 참석하던 모습은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을 정도였지만 아무리 말려도 선생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금요일 공연을 마치면(대학로로 오기 전까지는 금요일에 하우스콘서트를 했다) 온 주말을 할애해 공연실황의 오디오와 비디오 편집을 마쳤고, 월요일이면 무조건 편집을 끝낸 파일을 연주자에게 전달했다. 공연 프로그램지를 출력할 때는 반으로 접히는 안쪽 방향으로 종이가 휘어지도록 세팅했고, 실수로 반대방향으로 세팅해 종이가 바깥으로 조금이라도 휘어지면 오탈자가 없음에도 다시 출력했다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표 나지 않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디테일하게 하콘을 매만져 온 선생님의 가르침을 나는 얼마나 따라가고 있는 걸까. 불꽃쇼에 놀라 도망가지 않은 덕분에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그 역시 끈기와 책임감을 강조한 선생님의 철학을 나도 모르게 흡수했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하루하루 하콘을 책임진다는 것의 무게를 실감하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똑같이 할 수는 없겠지만 딱 하나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하콘을 대하는 나의 태도다. 그리고 지금 하콘과 함께하는 모든 스태프들에게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같이 이곳을 매만지자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같이 발전해 나가자고 말하는 나의 목소리다.
그런 나의 휴대폰 연락처에 선생님은 아직도 ‘박틀러’라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내게 ‘리틀 박창수’라는 별명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