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 "70代에 ELS 팔아놓고 은행들은 자기면피"
입력
수정
지면A4
23개 자산운용사 CEO 간담회서 '작심 발언'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최근 논란이 된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투자 손실 사태와 관련해 “70대 이상 고령층에게 복잡한 고난도 상품을 권유하는 것 자체가 적합한가”라며 “은행들이 자기 면피를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당국 수장이 검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ELS 판매를 불완전판매로 몰아가자 “자기책임 투자 원칙이 또 무너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노후보장 목적으로 온 노령층에
은행창구에서 복잡한 상품 권유
저조차 수십쪽 설명서 잘 안읽혀
판매 적합성 원칙 따져야할 문제"
은행권 "사실상 불완전판매 규정
자기책임 원칙 허물어질라" 우려
○“은행은 과연 아무런 책임 없나”
이 원장은 이날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금감원·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 간담회’ 이후 기자들과 만나 은행권을 향해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무(無)지성’ ‘자기 면피’ 등 비판 수위가 높은 단어들도 썼다.‘ELS 투자 손실’에 대한 의견을 묻자 이 원장은 “솔직한 속내를 말씀드리겠다”며 운을 뗀 뒤 “최근 일부 은행에서 묻기도 전에 무지성으로 ELS 관련 소비자 피해 예방 조치를 운운하는데 소비자를 보호했다고 들리기보다는 자기 면피 조치를 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아마도 판매 과정에서 자필을 받았거나 녹취한 것 때문에 불완전판매가 아니라는 입장 같은데 금융소비자보호법의 본질적 취지를 살펴보면 그런 말을 쉽게 하기 어렵다”며 “금융회사는 소비자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가입 목적에 맞는 적합한 상품을 권유하는 적합성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ELS를 팔기 전 투자 리스크를 충분히 설명했다는 시중은행들의 해명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시중은행들의 판매 관행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 원장은 “ELS와 같은 고위험, 고난도 상품을 다른 곳도 아닌 은행창구에서 고령자에게 특정 시기에 고액으로 판매했다는 것만으로 적합성 원칙이 지켜졌는지 의구심이 있다”며 “저조차 잘 안 읽히는 수십 장짜리 설명서에 대해 소비자가 ‘네, 네’라고 답변했다고 해서 은행이 아무런 책임이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설명 여부를 떠나 노후보장 목적으로 정기예금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70대 고령 투자자에게 수십%의 원금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상품을 권유한 것 자체가 적합성 원칙을 따져야 할 문제”라고 했다.
○은행권 “자기책임 원칙 또 무너지나”
제도 개정 가능성도 시사했다. 그는 “지금 단계에서 (제도 개선을) 말하는 건 조심스럽다”면서도 “현 제도가 설명 의무와 관련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금융사에 면책만 해주고 있지 않냐는 생각이 있다”고 했다. 이어 “연내 기초 사실관계를 파악하려고 노력 중인데 일부 민원이나 분쟁 조정 예상 상황들이 있다”며 “(소비자와 금융사 간) 책임 분담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적절치 않나 하는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은행 및 증권업계는 이날 이 원장의 발언에 대해 “고령층에 대한 ELS 판매를 사실상 불완전판매로 규정한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특히 투자자의 자기책임 원칙이 또다시 허물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ELS 가입자 대부분은 그동안 상품을 통해 수익을 본 수익자들인데 만약 불완전판매 책임을 물어 피해를 보상하게 된다면 이익이 날 때는 소비자가 가져가고 손실이 발생할 땐 금융사가 책임지는 선례가 남는다는 것이다. 은행권은 특히 2021년은 코로나19 사태로 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연 0.5~1.0%에 그쳐 연수익률이 3~4.3%인 ELS를 선호한 고객이 많았다고 항변했다. 한 시중은행 신탁담당 관계자는 “ELS 출시 이후 지수형 ELS의 손실 사례가 없었다”며 “ELS 가입 고객의 대부분이 기존 수익을 올린 경험이 있는 투자자였다”고 했다.
이번 ELS 사태를 과거 라임·옵티머스와 같이 불법적인 펀드로 인해 발생한 사건과 비슷한 잣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불만도 나온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고객의 피해와 손실은 구별해야 한다”며 “글로벌 지수를 추종하는 ELS처럼 합법적으로 운영됐음에도 손해가 난 건 소비자가 손실을 본 것이지 피해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성상훈/김보형 기자 up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