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투자 '반토막'…지방벤처·대학 창업부터 흔들린다 [긱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1. 대학생 창업팀 누트컴퍼니의 신동환 대표는 종이로 된 코딩노트를 디지털 템플릿으로 전환을 고민하던 2020년 오아시스엔젤클럽의 유진영 변호사를 만났다. 당시 1억5000만원의 엔젤 투자를 받은 것을 발판으로 온라인 문구 플랫폼 ‘위버딩’이 탄생했다.

#2. 교육용 3D 프린팅을 개발한 엔닷라이트는 3D 프린터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사업을 접어야 할 위기를 겪었다. 메타버스 테마가 열리면서 3D 콘텐츠 제작 툴로 피보팅(사업모델 전환)에 성공했다. 박진영 대표는 창업 이후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견디는 데 한 기업인 출신 엔젤투자자가 가장 큰 버팀목이 됐다고 말했다. 주로 극초기 스타트업을 발굴·투자하는 엔젤투자자는 스타트업 생태계의 든든한 후원자로 불린다. 카카오가 5000억원에 인수한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도 그 시작은 이재웅 다음 창업자의 엔젤 투자였다. 미국 실리콘밸리와 중국 선전의 스타트업 생태계에 활력을 넣은 것도 엔젤투자자다.

국내 엔젤투자자는 1만명을 돌파하며 양적으로는 늘고 있지만,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엔 가야 할 길이 멀다. 지난해까지 성장세를 보였던 개인의 엔젤펀드·벤처펀드 투자는 올해 들어 40~50%가량 확 꺾였다. 극초기 기업 자금줄이 막히면서 청년 창업과 지방 벤처 생태계부터 흔들리고 있다.

미·중 창업 생태계 키운 엔젤투자자

미국에선 기존 플랫폼에 맞서는 신생 스타트업에 유명 창업자들이 엔젤투자자로 나서는 것은 흔한 풍경이다. 오픈 소스 방식의 협업툴을 가지고 ‘노션’의 대항마로 나선 앱플로위가 지난달 오토매틱의 설립자 매트 물렌웨그, 유튜브의 스티브 첸, 깃허브의 톰 프레스턴-워너, 레드햇의 밥 영, 클라우데라의 아무르 아와달라 등 유명 창업자로부터 640만달러(약 83억원)의 시드 자금을 조달했다.엔젤 투자 플랫폼 '엔젤리스트'는 개인들의 엔젤투자를 손쉽게 만든다. 엔젤리스트는 펀드 결성시 출자자(LP)를 모집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지난해 엔젤리스트를 통해 집행된 벤처투자 규모만 4조원을 넘을 정도로 활성화돼있다. YC콤비네이터 데모데이 펀드도 이곳에서 개인투자자를 모집한다. 뿐만 아니라 펀드 행정 서비스도 제공하면서 1인 엔젤펀드, 벤처펀드 운용사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세제 혜택도 개인들이 엔젤 투자에 나서는 이유다. 데이비드 리 삼성넥스트 부사장은 “실리콘밸리의 성공 뒤엔 엔젤 투자 세액공제가 있다”며 “1000만달러(약 132억원) 미만의 벤처투자 수익에 대해서는 세금이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벤처 생태계는 실리콘밸리를 닮았다. 성공한 창업가들이 엔젤투자자로 변신한 경우가 많다. 중국판 손정의로 불리는 공홍쟈, 샤오미 창업자 레이쥔, 30세에 스트레이트 이노베이션을 상장시킨 왕치청, 720여개 기업에 투자한 시우샤오핑, 알리바바 임원 출신 왕강 등이 가장 유명한 엔젤투자자로 손꼽힌다. 중국의 엔젤투자자는 1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1984년 이후 지난해까지 2만4500건가량 이뤄졌다.

혹한기 엔젤 투자 나서는 선배 창업가들

국내에서도 창업으로 성공한 기업인들이 엔젤 투자 '큰손' 역할을 하고 있다. 이재웅 창업자를 비롯해 장덕수 DS자산운용 회장,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이 손꼽힌다. 장덕수 회장이 발로 뛰어 직접 비상장사를 발굴해 키우는 편이라면, 장병규 의장은 예비 창업가들이 보내오는 콜드 메일을 보고, 웬만하면 5000만원씩 ‘쾌척’하는 스타일이다. 이밖에 김상범 전 넥슨 이사 등도 엔젤투자자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자리 잡은 한국계 창업가들도 후배를 키우는 ‘엔젤’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용(B2B) 채팅 솔루션을 선보인 센드버드의 김동신 대표는 미국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시장에 도전하는 딥블루닷의 엔젤투자자로 나섰다. 프라이머, 82스타트업, 트랜스링크인베스트먼트 등 액셀러레이터 및 벤처캐피털(VC)도 엔젤투자의 창구가 되고 있다.메쉬업엔젤스가 이달초 결성한 275억원 규모의 ‘가치성장벤처펀드’엔 장병규 의장을 비롯해, 김성훈 업스테이지 대표, 김현준 전 뷰노 대표 등 선배 창업자가 출자자로 나섰다. 오늘의집, 캐시워크, 핀다, 스타일쉐어, 마이리얼트립, 시프티 등 엔젤 투자를 기반으로 스타트업을 키운 창업자들도 출자해 엔젤투자의 ‘선순환’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지난해엔 이유경 삼보코터스 사장 주도로 중견기업 2세들이 한국계 미국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한 SB엔젤클럽을 결성하기도 했다.

빠르게 지갑 닫는 개인 엔젤투자자

하지만 고금리 여파로 벤처·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개인 엔젤투자자의 지갑이 급속도로 닫히고 있다. 국내에서도 5000만원 한도 소득공제 혜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엔젤투자지원센터에 가입한 개인회원이 3만명을 넘어섰지만,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엔 가야 할 길이 멀다.

엔젤투자지원센터에 따르면 개인들이 돈을 모아 벤처·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엔젤펀드(개인투자조합)’ 성장세는 올해 들어 확 꺾였다. 지난해 994개 엔젤펀드를 통해 6850억원을 결성한 데 반해 올해 들어 10월 말까지 674개 엔젤펀드에서 4027억원을 결성하는 데 그쳤다. 이에 모태펀드는 두차례 ‘지역엔젤투자 재간접펀드’를 결성하고, 225억원을 출자하며 긴급 수혈에 나섰다.

벤처투자 혹한기가 이어지면서 개인의 지갑은 더 빨리 닫히고 있다. 모태펀드 예산 급감으로 창업투자회사와 신기술금융회사가 운영하는 ‘벤처펀드’(벤처투자조합)에서 민간 부문이 차지하는 출자 비중은 올해 3분기까지 86.2%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84.9%보다 증가했지만, 그중 개인의 출자 비중은 15.9%에서 10.9%로 쪼그라들었다. 개인 출자액도 9201억원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54.5% 급감했다.

한 액셀러레이터 대표는 “지난해까지 지역 기업인, 삼성·LG 임원 출신들이 만든 엔젤펀드가 줄줄이 만들어졌지만, 고금리와 부동산 시장 침체로 약정된 분납금을 내지 못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 창업·지방벤처부터 '흔들'

주로 극초기 스타트업을 발굴·육성해온 자금줄이 위축되면서 청년 창업과 지방 벤처 생태계부터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맴돌고 있다.

홍종철 인포뱅크 아이엑셀 대표는 “최근 창투사·신기사들이 매출이 없는 스타트업에 투자를 꺼리면서 ‘죽음의 계곡’을 건너고 있는 프리 A 단계 스타트업의 투자 공백이 심각하다”며 “엔젤 투자가 이 공백을 메우지 않으면 창업 생태계가 선순환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호재 와이앤아처 대표는 “한해 2000개 극초기 창업팀을 검토하는데 투자 혹한기가 이어지면서 대학생 창업도 정체되는 분위기”라고 우려했다.고영하 엔젤투자협회 회장은 “엔젤 투자가 위축되면 지방 초기 창업 생태계와 벤처기업부터 흔들린다”며 “정부 예산 1조원 쓰는 것보다 엔젤 투자 1000억원의 효과가 큰 만큼, 지방 엔젤 투자 활성화를 위해 교육지원, 세액공제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동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란/김종우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