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 왕도 피아노 안되는 날이 있다...손흥민이 항상 골을 못 넣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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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현식의 클래식 환자의 병상일지“아니, 유자가 부산에서는 앵콜을 8곡이나 쳤다는데?”
아내가 기사를 보내왔다. 우리가 갔던 서울 공연에서, 유자 왕은 앵콜을 3곡밖에 치지 않았다. 어떤 연주자에겐 3곡도 많지만 유자는 앵콜곡을 많이 치는 것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다. 우리 부부는 지난해에도 유자의 리사이틀을 봤는데, 그때는 열두곡인가를 쳐서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더랬다. 올해 서울 공연에서의 유자는 달라 보였다. 세번째 앵콜곡을 친 다음에는 박수와 환호가 이어지는데도 아예 무대에 다시 나오지 않았다. 온몸에서 뿜어내는 열정으로 객석 전체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던 지난해의 그녀가 아니었다.
축구선수는 컨디션이 안 좋으면 강슛을 못 때리는 게 아니다. 섬세한 플레이가 잘 안되는 것이다. ‘퍼스트 터치’가 길어진다. 강하게 날아오는 패스의 속도를 줄여 내 발 앞에 착 붙여놓지 못한다.
'피아니스트도 비슷한건가'란 생각을 했다. 유자가 거칠고 강하게 피아노를 몰아붙일 때는 별 문제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쇼팽과 베토벤 곡의 중간부분, 작고 섬세한 터치들로 음악을 구축해 나가는 부분에서 소리의 응집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해와 달리 음악에 허전한 구석이 느껴졌다.음악 연주도 몸으로 하는 일이니 몸 컨디션의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다. 게다가 현대의 스타급 연주자들은 워낙 짧은 기간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많은 연주를 하기 때문에 컨디션 관리가 더욱 어렵다고 한다. 그만큼 자기관리도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로봇이 아닌 다음에야 사람이 매일 최상의 컨디션일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하필 내가 비싼 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 간 날 연주자의 컨디션이 나쁜 경우다. 뉴욕에서 근무하던 10여년 전의 일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명 테너 요한 보타가 베르디 '오텔로'의 주연으로 나온다길래 보러 갔는데, 그날 보타의 노래는 완전 ‘꽝’이었다. 극장 앞에서 환불요구 1인시위라도 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뉴욕의 겨울시즌은 추운 날씨 탓에 가수들이 종종 감기에 걸려 악전고투한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가 간 날 그 음악가가 일생일대의 명연주를 하는 행운이 따를 수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감수해야 한다. 손흥민 경기 보겠다고 런던까지 갔는데 하필 그날 못할 수도 있는거다. 그게 싫으면 집에서 음반을 듣고 영상을 보면 된다.
하지만 그런 예측불가능성 덕분에 가슴이 설렌다. “아, 오늘은 또 얼마나 새로운 연주를 만나게 될까.” 나는 오늘도 공연장에 가기 위해 퇴근길을 서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