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제조기 빌려쓰자"…전세계 과학자 7만명, 포항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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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가속기연구소 가보니아토초는 100경분의 1초다. 사람이 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움직임이 밀리(1000분의 1)초 단위인 것을 고려하면, 마이크로(100만분의 1)초, 나노(10억분의 1)초, 피코(1조분의 1)초, 펨토(1000조분의 1)초보다 훨씬 작은 아토초는 말 그대로 ‘찰나(刹那)의 순간’이다.
방사광가속기로 각종 연구 지원
X선 결합…세계최고 장비 갖춰
작년 과학자 7만7000여명 방문
SCI급 논문 9230편 출간 성과
바이오·반도체 등 기업 R&D도
올해 노벨물리학상은 아토초 단위로 빛을 내는 연구를 한 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수소 원자에서 전자가 핵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150아토초다. 아토초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으면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를 훤히 볼 수 있다. 원자를 분해하거나 재조립하는 일도 가능해진다.포항가속기연구소(PAL) 방사광가속기는 국내에서 드물게 아토초 단위를 살펴볼 가능성이 있는 초대형 연구 시설이다. 강흥식 PAL 소장은 1일 집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만나 최근 진행 중인 아토초 연구에 대해 소개했다. 그는 양자컴퓨터를 예로 들며 “추가 설비 개발이 완료되면 그간 알 수 없었던 양자 현상의 원리를 밝혀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태양광 100경 배’ 밝은 빛
방사광(放射光)은 ‘퍼져 나오는 빛’이다. 매우 빠르게 이동하는 전자가 방향을 바꿀 때 방출되는 X선 등을 말한다. 일부 방사광은 가시광선과 달리 물체를 통과한다. 병원에서 X선 촬영을 통해 뼈의 모습을 보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방사광가속기는 ‘초고성능 현미경 겸 사진기’다. 방사광이 방출되는 세기와 파장을 변형해 매우 작은 시간과 공간 단위로 물질과 현상을 볼 수 있다. PAL의 가속기 시설은 현재 1나노미터(㎚·1㎚=10억분의 1m) 크기 입자가 펨토초 단위로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PAL은 초대형 과학 연구 시설이다. 전체 대지면적이 12만6800㎡에 달한다. 축구장 85개 넓이다. 1994년 처음 건설됐다. 1500억원(국비 596억원, 포스코 864억원 등)을 들여 3세대 가속기를 구축했다. 이어 2015년 국비 4298억원을 투입해 4세대 가속기의 일종인 자유전자레이저(XFEL)를 구축했다.
적외선과 자외선, X선 방사광을 방출하는 3세대 가속기는 △전자를 발생시키는 전자총 △전자를 가속하는 길이 180m 선형가속기 동(棟) △전자를 원형으로 회전시켜 방사광을 발생시키는 둘레 281m 원형저장링 동 등으로 이뤄졌다. 태양광의 100억 배에 달하는 강한 빛을 얻을 수 있다.저장링에는 대형 전자석 24개가 설치돼 있다. 가속기동을 통과해 저장링에 도착한 전자는 15도씩 24번 방향을 바꾸며 원형 궤도를 돈다. 방향을 틀 때마다 방사광이 밖으로 나온다. PAL을 찾은 세계 각국의 연구진은 각자 실험에 필요한 파장의 방사광을 선택해 연구에 활용한다.
X선에 특화된 XFEL 가속기 동은 국내 단층 건물 중 최장 길이(1.1㎞) 건물이다. 서울 잠실 롯데타워를 두 개나 누일 수 있다. 건설에 총 4500가구 아파트를 세울 수 있는 콘크리트가 타설됐다. 건물에는 길이 780m의 선형가속기 터널과 250m의 언듈레이터 홀, 80m의 빔 라인 등이 있다. 태양광의 100경 배에 달하는 빛을 10GeV(기가전자볼트) 전자빔으로 발생시킨다.
전자총에서 나와 선형가속기를 거쳐 가속한 전자는 영구자석이 놓인 언듈레이터 홀을 지나며 좌우로 진동한다. 이 과정에서 X선의 파장 간격으로 정렬돼 뭉쳐진 X선 레이저를 최종 빔 라인에서 연구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코로나 백신·반도체 소재 연구 활용
PAL의 장비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3세대 방사광과 X선 레이저를 모두 낼 수 있는 연구소는 세계에서 다섯 곳뿐이다. 미국 스탠퍼드 선형가속기센터(SLAC)와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독일 전자-싱크로트론 연구센터(DESY), 스위스 폴쉐르연구소(PSI)다. 강 소장은 “X선 레이저의 세기와 안정성 등은 PAL이 오히려 다른 연구소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설명했다.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이 PAL을 찾아 연구를 진행했다. 작년까지 PAL을 찾은 과학자는 7만7335명이다. 학술적 기여도가 높은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은 9230편 출간됐다. 국제학술지 표지 논문도 다수 PAL에서 나왔다.
산업 분야에서도 PAL을 활용한 연구는 다양하다. 셀트리온이 국내 최초 코로나19 치료제 레키로나주를 개발할 때도 PAL이 활용됐다. 연구진은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이에 결합하는 항체를 2020년 4월 받았다. 항원과 결합하는 항체의 구조를 분자 수준의 초고해상도로 규명했다. 해당 항체는 2021년 2월 국산 코로나19 치료제 1호로 고위험군 환자의 증상 완화를 위해 활용됐다.
삼성전자도 SAIT(옛 종합기술원)를 통해 PAL과 다양한 공동 연구를 했다. 실리콘 대신 몰리브덴이황화물(MoS2)을 사용한 차세대반도체 소재 연구, 1㎚ 이하 선폭에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하프니아(HfO2) 기반 강유전물질 반도체 소재 연구 등이다.
현재 PAL은 XFEL에 경X선 빔 라인을 추가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강 소장은 “국내외 연구자들과 협업해 한국 최초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연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 방사광
퍼져 나오는 빛. 전자가 방향을 바꾸며 나오는 X선 등.▶ 방사광가속기
초고성능 현미경 겸 사진기. 방사광을 변형해 미세 입자를 짧은 시간 단위로 관찰 가능.
포항=김진원/정희원 기자 jin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