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걷기의 사회학] Slow 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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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1-1 걷기의 종말과 재탄생
현대인이 걷는 이유와 우리의 선조들, 불과 50~60여 년 전의 세대들이 걷던 이유는 다르다. 이전에는 생존하기 위하여 걸었지만, 이제는 건강하게 살기 위하여 걷는다. ‘걷기의 종말’이 오기 직전에 인간이 걸어야 할 세 가지 이유와 맞닥뜨렸다.1 본원적 기능 – 종말
나는 걷기의 기능을 둘로 나누었다. 본원적 기능과 파생적 기능. 본원적 기능은 말 그대로 걷기의 근원적 이유, 인간이 태곳적부터 걸었던 이유는 생존하기 위하여서이다. 달리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만한 수단이라고는 절대 다수의 사람에게는 두 다리가 유일했다. 맹수로부터 도망가기 위해서, 논밭에 농사짓기 위해서, 전쟁하기 위해서, 장사하기 위해서 인간은 걷고 뛰었다. 걷지 않으면 죽음이던 시절에는 잘 뛰고 잘 걷는 것이 생존의 절대적 조건이었다. 이처럼 생존을 위하여 걸을 수밖에 없었을 때는 걸어가는 그 자체에 대한 의식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근세 이전의 문헌에서 걷는다는 행위에 대하여 특별하게 언급되는 것은 ‘사유하기 위한 도구’로서 걷기일 뿐이었다. 이처럼 걷는 것 자체가 주된 행위의 목적이 된 적은 없다. 군인에게는 전쟁하기 위하여 걸었고, 농부는 농토로 가기 위해 걸었고, 장사꾼은 장사하기 위하여 걸었다. 비록 ‘걷기’의 가장 본원적인 행위가 바로 장소이동, 즉 교통기능이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목적성을 가졌다거나 의미를 부여받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한국이 근대화되고 자동차, 버스, 기차가 대중교통 수단이 되면서 우리는 굳이 잘 뛰거나 잘 걸을 필요가 없어졌다. 걷기란 인간에게 계급이 생긴 이후로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은 아니었다. 힘이 있는 자는 서민은 함부로 갖지 못하는 탈 것을 이용해서 움직였다. 말, 마차, 가마는 자동차가 나오기 전까지 유사 이래 거의 5,000여 년 동안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나타난 자동차, 기차는 모든 계급이 걷지 않아도 생존할 근거를 만들어 주었고, 걷는다는 것이 대단히 비효율적인 활동이 돼버렸다. 계급의 구분은 희미해지고, 노동 수단은 기계로 대체되었다. 이전에는 걸어갔을 500m 옆의 논밭에도 자동차가 경운기를 끌고 가서 농사를 짓는 시대가 되었다. 장사를 하는 사람도 서울과 부산 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사업하기에는 걸리는 시간과 노력 대비 남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500㎞가 넘는 길을 한 달 남짓 걸려서 걸었다. 장사하는 보부상들은 이렇게 먼 거리를 상권으로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반경 50~60㎞ 정도로 하고, 근방에서 열리는 오일장이 그들의 활동 반경이다. 그도 그럴 것이 등짐지고 길을 떠나기란 쉽지 않았고, 그 등짐의 무게가 체력의 한계이자 장사 규모의 한계였기 때문이다. 전쟁도 여전히 보병이 주력이기는 하지만, 실제 전장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걸어 다니는 보병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폭탄을 쏟아붓는 공군과 탱크 타고 포를 쏘아대는 포병·기갑병이다. 군대도 이제 걷기가 드물어졌다. 근대화 시대가 도래한 지 불과 수십 년 만에 300여 만 년을 지속해오던 걷기는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2. 걷기의 파생적 기능 – 걷기의 재탄생
걷기가 비로소 저 스스로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모순되게도 본질적 의미의 걷기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이다. 자동차가 거리를 점령하고 사람들이 100m 걷기도 힘겨워할 무렵부터 걷기는 재조명받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문명의 발전과 반비례로 잊혀 가는 그리고 약해져 가는 인간의 두 다리, 직립보행의 특성으로 받았던 혜택의 되살리기이기도 하다. 육체적 활동을 함으로써 육체와 정신의 합일을 시도하는 새로운 영적 행위가 되었다. 차갑고 딱딱한 아스팔트 위를 시속 100㎞로 달리는 자동차로 인하여 잊어버린 자연 속의 여행이라는 의미를 되찾아내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건강을 위해서 걷고 명상을 위해서 걷는다. 이제 걷기를 노동으로 보는 시각은 없어졌다.가. 치료 및 예방을 위한 걷기우선 치료 및 예방은 인간의 걷기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발과 이와 연관된 부분의 신체가 퇴화하면서 유발되는 질병의 치료 및 예방에 중점을 둔 것이다. 현대 의학에서 걷기의 중요성을 점점 더 강조하고 있다. 또한 육체적 치료와 예방뿐만 아니라 심리적 치료에도 걷기를 빼놓지 않는다. 걷기는 중간 강도의 신체활동이 만성질환(생활습관병)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많은 연구가 있다. 특히 통증이 있는 부분의 통증 완화를 주된 치료 목적으로 하는 현대 의학은 병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현대 의학은 치료비와 검사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 이러한 현대 의학의 한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대체요법을 찾는데, 그중의 하나가 걷기이다. 발반사요법, 김세연의 스본스도(KSNS)나 어싱 맨발 걷기가 그 주요한 대체의학 중의 하나이다. 이들 대체의학은 비록 현대 의학이 말하는 의학적 근거는 약하나, 실제 치료 경험을 증언하는 실증적 사례는 무척 많다. 발반사요법은 이집트 시대부터 있었고, 세종대왕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시간의 검증’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스본스도나 어싱 맨발 걷기는 최근에 나와 불과 20여 년 안팎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향후 과학적 근거를 가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나. 운동을 위한 걷기
걷기의 또 다른 기능은 '운동'이다. 가장 기본적인 운동으로서 걷기는 대체로 척주 교정 효과와 퇴화한 근육의 사용을 통한 인체의 건강 회복에 중점을 둔다. 이는 발의 기초 해부학 및 생리학, 전족 이상과 당뇨가 발에 미치는 영향, 신발 구조와 제조법 등을 통하여 의료상의 효과를 노리는 걷기이다. 마사이워킹 신발이 가장 유명하고, 이를 주도하였던 MBT(마사이 신발)의 경우 유럽에서 의료기구로 공인을 받기도 하였다. 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특수한 경우에 사용되는 신발이라는 개념이기도 하다. 항상 운동량의 부족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마라톤은 너무 힘들고, 자전거와 같은 운동은 도구가 필요한 데, 그 사용 시기와 장소가 제약받아 일상적으로 행하기 어려움이 있다. 걷기는 그야말로 시간과 신발만 있으면 되면서도 충분한 운동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자주 사용되는 ‘Power walking’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 데, 시속 5~6킬로미터 정도의 속보를 요하는 걸음이다. 항상 운동량의 부족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마라톤은 너무 힘들고, 자전거와 같은 운동은 도구가 필요한 데, 그 사용 시기와 장소가 제약받아 일상적으로 행하기 어려움이 있지만, 걷기는 그야말로 시간과 신발만 있으면 되면서도 충분한 운동 효과를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프로스펙스, 르까프, 나이키 등에서 나오는 워킹화들이 이런 종류이다.다. 삶의 새로운 가치 추구
‘삶의 새로운 가치 추구’로서 걷기는 위의 두 가지 기능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보다 더 높이, 더욱더 빨리’를 밀어붙이는 현대의 삶에 반기를 드는 ‘느림의 미학’을 추구한다. 평소에 차를 타고 시속 100킬로미터로 휙 지나가던 곳을 걸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물의 모습을 그저 스쳐 지나가지 않고, 시속 3~4킬로미터의 속도로 바라보게 되며, 그러다 보면 사물에 대해 숙고하는 법을 배우게 되기도 한다. 빠르게 살아가면서 잊혀버린 ‘자연과 풍광, 주변 삶’에 대한 감상 능력을, 느리게 걸으면서 세상에 대한 숙고와 존중을 알게 되는 우아한 기술이기도 하다. 이는 ‘자연을 밟지 말고 느끼자’라는 필맥스의 ‘맨발신발’이 추구하는 바이다. 이제 '걷기'는 단순히 장소이동을 위한 교통수단으로써 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복고풍 교통수단이면서, 철학자들이 가장 즐겨 사용한 사유의 수단인 '걷기'. 지금은 걷는 것 자체가 유행하고 있다. 현대 걷기의 가장 유별난 특징은 레저로서, 즐기기 위한 스포츠로 인기가 높아져 가고 있는 점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올레길, 둘레길, 마을 길, 산책길을 걷는다. 풍광이 좋거나 교차로 지점에는 걸어서 방문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스티커에 도장을 찍는 놀이도 생겼다. 시멘트로 꽉 찬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즐기며, 인간이 사는 그곳에서 이야기를 즐기며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 걷기는 이제 생존은 물론이고, 건강과 놀이와 사색이 어우러진 놀거리이다. 이 우아하게 고통스러운 유행을 통하여 인간은 삶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3 맨발로 자연으로 회귀
이제 인간에게 걷는 것은 우아한 사치가 되었지만, 사치만으로는 왠지 부족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맨발 걷기이다. 맨발 걷기는 현대인에게 자연이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인 바탕이 됨을 깨닫게 해준다. 현대인은 단순히 건강이나 운동을 하는 공간이 아닌, 자연과 깊은 연결을 통해 더 여유 있고 풍성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바람을 더 갖게 되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결이 결국 인간 자신의 구원과 건강을 위한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도 결국 자연의 일부이며 우리에게 삶의 바탕을 제공하는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결국 인간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맨발 걷기는 환경을 보호하고 자연에 대한 인식을 실제 몸으로 깨닫게 되는 방법이다. 현대 사회에서 맨발 걷기는 자연과의 조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이고, 자연을 이해하고 일체가 되고자 했다. 이를 통해 현대인은 자연과의 균형을 유지하며 건강을 유지하는 삶을 찾고자 했다. 맨발 걷기는 이러한 인식을 수행하는 방법의 하나로, 우리가 자연과 더욱 가까워지도록 중요한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인간은 맨발로 생활하다 신발을 신고 다녔고 이제는 다시 맨발로 걷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인간이 그 오랜 시간을 거친 뒤에 왜 발을 보호해주던 신발을 벗게 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한경닷컴 The Lifeist> 홍재화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나는 걷기의 기능을 둘로 나누었다. 본원적 기능과 파생적 기능. 본원적 기능은 말 그대로 걷기의 근원적 이유, 인간이 태곳적부터 걸었던 이유는 생존하기 위하여서이다. 달리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만한 수단이라고는 절대 다수의 사람에게는 두 다리가 유일했다. 맹수로부터 도망가기 위해서, 논밭에 농사짓기 위해서, 전쟁하기 위해서, 장사하기 위해서 인간은 걷고 뛰었다. 걷지 않으면 죽음이던 시절에는 잘 뛰고 잘 걷는 것이 생존의 절대적 조건이었다. 이처럼 생존을 위하여 걸을 수밖에 없었을 때는 걸어가는 그 자체에 대한 의식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근세 이전의 문헌에서 걷는다는 행위에 대하여 특별하게 언급되는 것은 ‘사유하기 위한 도구’로서 걷기일 뿐이었다. 이처럼 걷는 것 자체가 주된 행위의 목적이 된 적은 없다. 군인에게는 전쟁하기 위하여 걸었고, 농부는 농토로 가기 위해 걸었고, 장사꾼은 장사하기 위하여 걸었다. 비록 ‘걷기’의 가장 본원적인 행위가 바로 장소이동, 즉 교통기능이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목적성을 가졌다거나 의미를 부여받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한국이 근대화되고 자동차, 버스, 기차가 대중교통 수단이 되면서 우리는 굳이 잘 뛰거나 잘 걸을 필요가 없어졌다. 걷기란 인간에게 계급이 생긴 이후로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은 아니었다. 힘이 있는 자는 서민은 함부로 갖지 못하는 탈 것을 이용해서 움직였다. 말, 마차, 가마는 자동차가 나오기 전까지 유사 이래 거의 5,000여 년 동안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나타난 자동차, 기차는 모든 계급이 걷지 않아도 생존할 근거를 만들어 주었고, 걷는다는 것이 대단히 비효율적인 활동이 돼버렸다. 계급의 구분은 희미해지고, 노동 수단은 기계로 대체되었다. 이전에는 걸어갔을 500m 옆의 논밭에도 자동차가 경운기를 끌고 가서 농사를 짓는 시대가 되었다. 장사를 하는 사람도 서울과 부산 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사업하기에는 걸리는 시간과 노력 대비 남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500㎞가 넘는 길을 한 달 남짓 걸려서 걸었다. 장사하는 보부상들은 이렇게 먼 거리를 상권으로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반경 50~60㎞ 정도로 하고, 근방에서 열리는 오일장이 그들의 활동 반경이다. 그도 그럴 것이 등짐지고 길을 떠나기란 쉽지 않았고, 그 등짐의 무게가 체력의 한계이자 장사 규모의 한계였기 때문이다. 전쟁도 여전히 보병이 주력이기는 하지만, 실제 전장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걸어 다니는 보병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폭탄을 쏟아붓는 공군과 탱크 타고 포를 쏘아대는 포병·기갑병이다. 군대도 이제 걷기가 드물어졌다. 근대화 시대가 도래한 지 불과 수십 년 만에 300여 만 년을 지속해오던 걷기는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2. 걷기의 파생적 기능 – 걷기의 재탄생
걷기가 비로소 저 스스로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모순되게도 본질적 의미의 걷기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이다. 자동차가 거리를 점령하고 사람들이 100m 걷기도 힘겨워할 무렵부터 걷기는 재조명받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문명의 발전과 반비례로 잊혀 가는 그리고 약해져 가는 인간의 두 다리, 직립보행의 특성으로 받았던 혜택의 되살리기이기도 하다. 육체적 활동을 함으로써 육체와 정신의 합일을 시도하는 새로운 영적 행위가 되었다. 차갑고 딱딱한 아스팔트 위를 시속 100㎞로 달리는 자동차로 인하여 잊어버린 자연 속의 여행이라는 의미를 되찾아내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건강을 위해서 걷고 명상을 위해서 걷는다. 이제 걷기를 노동으로 보는 시각은 없어졌다.가. 치료 및 예방을 위한 걷기우선 치료 및 예방은 인간의 걷기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발과 이와 연관된 부분의 신체가 퇴화하면서 유발되는 질병의 치료 및 예방에 중점을 둔 것이다. 현대 의학에서 걷기의 중요성을 점점 더 강조하고 있다. 또한 육체적 치료와 예방뿐만 아니라 심리적 치료에도 걷기를 빼놓지 않는다. 걷기는 중간 강도의 신체활동이 만성질환(생활습관병)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많은 연구가 있다. 특히 통증이 있는 부분의 통증 완화를 주된 치료 목적으로 하는 현대 의학은 병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현대 의학은 치료비와 검사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 이러한 현대 의학의 한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대체요법을 찾는데, 그중의 하나가 걷기이다. 발반사요법, 김세연의 스본스도(KSNS)나 어싱 맨발 걷기가 그 주요한 대체의학 중의 하나이다. 이들 대체의학은 비록 현대 의학이 말하는 의학적 근거는 약하나, 실제 치료 경험을 증언하는 실증적 사례는 무척 많다. 발반사요법은 이집트 시대부터 있었고, 세종대왕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시간의 검증’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스본스도나 어싱 맨발 걷기는 최근에 나와 불과 20여 년 안팎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향후 과학적 근거를 가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나. 운동을 위한 걷기
걷기의 또 다른 기능은 '운동'이다. 가장 기본적인 운동으로서 걷기는 대체로 척주 교정 효과와 퇴화한 근육의 사용을 통한 인체의 건강 회복에 중점을 둔다. 이는 발의 기초 해부학 및 생리학, 전족 이상과 당뇨가 발에 미치는 영향, 신발 구조와 제조법 등을 통하여 의료상의 효과를 노리는 걷기이다. 마사이워킹 신발이 가장 유명하고, 이를 주도하였던 MBT(마사이 신발)의 경우 유럽에서 의료기구로 공인을 받기도 하였다. 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특수한 경우에 사용되는 신발이라는 개념이기도 하다. 항상 운동량의 부족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마라톤은 너무 힘들고, 자전거와 같은 운동은 도구가 필요한 데, 그 사용 시기와 장소가 제약받아 일상적으로 행하기 어려움이 있다. 걷기는 그야말로 시간과 신발만 있으면 되면서도 충분한 운동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자주 사용되는 ‘Power walking’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 데, 시속 5~6킬로미터 정도의 속보를 요하는 걸음이다. 항상 운동량의 부족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마라톤은 너무 힘들고, 자전거와 같은 운동은 도구가 필요한 데, 그 사용 시기와 장소가 제약받아 일상적으로 행하기 어려움이 있지만, 걷기는 그야말로 시간과 신발만 있으면 되면서도 충분한 운동 효과를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프로스펙스, 르까프, 나이키 등에서 나오는 워킹화들이 이런 종류이다.다. 삶의 새로운 가치 추구
‘삶의 새로운 가치 추구’로서 걷기는 위의 두 가지 기능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보다 더 높이, 더욱더 빨리’를 밀어붙이는 현대의 삶에 반기를 드는 ‘느림의 미학’을 추구한다. 평소에 차를 타고 시속 100킬로미터로 휙 지나가던 곳을 걸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물의 모습을 그저 스쳐 지나가지 않고, 시속 3~4킬로미터의 속도로 바라보게 되며, 그러다 보면 사물에 대해 숙고하는 법을 배우게 되기도 한다. 빠르게 살아가면서 잊혀버린 ‘자연과 풍광, 주변 삶’에 대한 감상 능력을, 느리게 걸으면서 세상에 대한 숙고와 존중을 알게 되는 우아한 기술이기도 하다. 이는 ‘자연을 밟지 말고 느끼자’라는 필맥스의 ‘맨발신발’이 추구하는 바이다. 이제 '걷기'는 단순히 장소이동을 위한 교통수단으로써 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복고풍 교통수단이면서, 철학자들이 가장 즐겨 사용한 사유의 수단인 '걷기'. 지금은 걷는 것 자체가 유행하고 있다. 현대 걷기의 가장 유별난 특징은 레저로서, 즐기기 위한 스포츠로 인기가 높아져 가고 있는 점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올레길, 둘레길, 마을 길, 산책길을 걷는다. 풍광이 좋거나 교차로 지점에는 걸어서 방문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스티커에 도장을 찍는 놀이도 생겼다. 시멘트로 꽉 찬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즐기며, 인간이 사는 그곳에서 이야기를 즐기며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 걷기는 이제 생존은 물론이고, 건강과 놀이와 사색이 어우러진 놀거리이다. 이 우아하게 고통스러운 유행을 통하여 인간은 삶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3 맨발로 자연으로 회귀
이제 인간에게 걷는 것은 우아한 사치가 되었지만, 사치만으로는 왠지 부족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맨발 걷기이다. 맨발 걷기는 현대인에게 자연이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인 바탕이 됨을 깨닫게 해준다. 현대인은 단순히 건강이나 운동을 하는 공간이 아닌, 자연과 깊은 연결을 통해 더 여유 있고 풍성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바람을 더 갖게 되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결이 결국 인간 자신의 구원과 건강을 위한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도 결국 자연의 일부이며 우리에게 삶의 바탕을 제공하는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결국 인간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맨발 걷기는 환경을 보호하고 자연에 대한 인식을 실제 몸으로 깨닫게 되는 방법이다. 현대 사회에서 맨발 걷기는 자연과의 조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이고, 자연을 이해하고 일체가 되고자 했다. 이를 통해 현대인은 자연과의 균형을 유지하며 건강을 유지하는 삶을 찾고자 했다. 맨발 걷기는 이러한 인식을 수행하는 방법의 하나로, 우리가 자연과 더욱 가까워지도록 중요한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인간은 맨발로 생활하다 신발을 신고 다녔고 이제는 다시 맨발로 걷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인간이 그 오랜 시간을 거친 뒤에 왜 발을 보호해주던 신발을 벗게 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한경닷컴 The Lifeist> 홍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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