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한번은 꼭 온다… ‘삼국지 광팬’에게 신세 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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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보름의 내가 사랑했던 모든 유물들TV 채널을 돌리다 삼국지 이야기를 하는 역사교양 프로그램을 봤다. 삼국지와 삼국지연의가 다르다는 기본 이야기부터,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이야기는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별 흥미가 없어 채널을 돌리려는데, 거주지를 공유하는 사람이 내가 볼 테니 그냥 두라고 했다. 거실에 같이 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삼국지덕후면 갑자기 귀도 밝아지는 것인가? 다 아는 얘길 뭘 또 본다는 것인지.
이 양반은 삼국지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삼국지연의’를 좋아한다. 취미생활(?)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얼마 전의 일이다. 올해 오랜만에 다른 대륙으로 휴가를 갔다. 여행은 좋지만 긴 비행시간은 정말 고역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미리 준비해둔 전자책을 몇 페이지 넘기는데, 옆에서 그가 무엇인가를 보며 키득거렸다. 뭘 보고 있냐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침착맨 삼국지!’
근데 이 삼국지덕후 양반이, 삼국지로 나에게 도움을 준 적도 있다. 십 년도 더 된 일이긴 한데, 환희와 허탈이 동시에 찾아온, 그때의 양가적 감정은 잊기가 어렵다. 여하튼 고마웠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삼국지도(삼국지연의도)〉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가격 협의는 얼렁뚱땅 뒤로 미루고 일단 작품을 들여왔다. 사진도 찍고, 감정도 하고, 경매 준비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두 가지 해결 못한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가격, 다른 하나는 병풍의 상세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가격은 잘 매겨주고 싶었지만, 그땐 미술시장이 호황도 아니었고, 심지어 겨울이었다. 이런 작품은 개인보다는 기관에서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데, 연말엔 일 년치 예산을 다 쓰고 정리할 때라 대체로 작품 구입에 큰 돈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보수적인 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자, 한 폭이 크기가 어떻게 되지? 세로 115cm, 가로 40cm구나. 이게 만약에 한 폭씩 돌아다닌다면 얼마면 안전하게 팔릴까? 한 500만원은 되겠지. 그러면 열 폭이니까 최소 5000만원. 근데 완질(完帙)이니까 좀 더 볼 수도 있을 텐데. 그래도 경합을 유도하려면 5000만원이 좋겠지? 그러면 소장자가 화낼까? 그래도 한번 물어나 볼까?’ 이런 사고의 단계 끝에 위탁자랑 협의한 금액은 시작가 6000만원. 자신은 없었지만, 놓치는 건 더 바보같아서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이제, 다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각 폭의 내용을 찾는 것. 삼국지 그림은 보통 어떻게 읽냐 하면, 유명한 도원결의, 삼고초려, 장판교 전투, 적벽대전 같은 장면을 먼저 찾고, 거기서 주요 등장인물을 식별해 내면서 이야기를 맞춘다. 화폭의 순서가 뒤죽박죽 되어있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얼굴 검고 수염이 많으면 장비, 청룡언월도 들고 얼굴 빨갛고 수염 길면 관우, 학익선(鶴翼扇)을 든 남자는 제갈량, 아기 안고 전투하는 남자가 있으면 아기는 유비의 아들, 그 남자는 조자룡. 그렇게 인물을 찾고 비교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면 보통 해결이 되는데, 이번 편은 도원결의, 삼고초려 다음에 대체 진도가 안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밥을 먹다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이 책을 샀어. 이런 책이 다 있더라’ 라고 했더니 대뜸,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보여줘’라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작품 사진을 보여줬는데, 이거 뭐, 술술 읊어대는데 거짓말 같았다. 믿을 수 없어서 아까 서점에서 산 책에서 그가 말한 내용이랑 장면을 맞춰봤는데, 도상(圖像)이 같았다. 이런! 난 며칠을 헤맸는데, 몇 분만에 해결되다니!
경매 결과는, 예상대로 많은 경합은 못했지만, 몇 번의 핑퐁 끝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 작품을 낙찰받았고, 몇 년 뒤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 전시에서 다시 공개되었다. 그때 은인(?)을 모시고 전시를 보러 갔었다. 작품 설명에 각 폭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굉장히 뿌듯해 하던 기억이 난다.
늦깎이 대학원생 시절, 교칙 때문에 학부수업 하나를 들어야만 했다. ‘서양미술사의 이해’ 였나, 학부생들이 그리스·로마 신화를 줄줄 읊어서 엄청 놀랐던 기억이 있다. 마침 ‘친구의 선배’였던 교수님께, ‘내가 무식한 거야? 대체 무슨 일이야?’ 라고 했더니, ‘이 친구들 어릴 때, 만화가 있었나 봐. 나도 첨엔 놀랬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 삼국지 병풍에 얽힌 일화를 포함해서, 이런 순기능이 있다면은 게임이라고 해서, 만화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뭐든지 지나친게 문제 아니겠는가? 컨텐츠는 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