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마음은 얻는 것이지 훔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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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저 말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나 깨달았다. 군 복무를 마치던 때다. 우리 집이 빼꼼히 올려다보이는 길지 않은 골목길에 낯선 아낙네가 아이를 업고 서성거렸다. 가로등이 들어와 어둡지는 않았지만, 싸락눈을 맞으며 우리집 대문을 바라보는 걸 창문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니 안쓰러웠다. 어머니가 “초인종을 누르길래 나갔더니 아버지 회사 직원 부인이라며 사장님 오실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더라”라고 궁금증을 풀어줬다. 어머니가 “들어와 기다리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저렇게 서 있다”라며 불편해했다.
늦은 밤에 귀가한 아버지를 대문 앞에서 붙잡고 그 여인이 얘기했지만, 아버지는 듣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그날 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튿날 퇴근한 아버지가 집 우편함에서 봉투를 꺼내 들고 들어와 어머니와 말씀을 나누는 소리가 났다. 내가 얼른 나가서 “어제 그 부인이 안 돼서 많지는 않은 돈을 넣은 봉투를 드렸으나 한사코 받지 않아 아이 업은 포대기 안에 넣어드렸다”고 자랑스레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대번에 “쓸데없는 짓 했다”라며 나무랐다.방에 불려들어가자 아버지는 어제 그 여인은 김 과장의 부인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김 과장은 내가 몇 번 만난 일이 있는 직원이었다. 은행의 권고로 회사 구조조정을 하면서 십여 명을 감원했다며 김 과장이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김 과장은 아버지가 가장 신임하고 아끼는 직원이어서 모두 그의 잔류를 의심하지 않았는데 감원명단 맨 앞에 나왔다고 했다. “그 친구는 어느 곳에 가서라도 무슨 일이든 잘 해낼 수 있기에 명단에 첫 번째로 넣었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는 “그는 회사에 꼭 필요한 직원이지만, 그는 자신도 모를 무한한 능력을 다른 데서 발휘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준 거다”라고 했다.
그날 설명한 고사성어가 ‘연저지인(吮疽之仁)’이다. 사기(史記) 손자 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나온다. 전국시대 위(魏)나라 장수 오기(吳起)가 자기 부하의 몸에 난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고쳤다는 고사다. 그는 위나라에 30년 가까이 있으면서 수많은 승리를 이끌고 사방으로 상당한 지역을 개척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실제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군사 이론으로 중국 역사에서 역대 명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본디 위(衛)나라 사람인 그는 젊은 시절 벼슬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나 가산만 탕진했다. 자기를 비웃는 마을 사람 30여 명을 죽이고 노(魯)나라로 도망가서 증자(曾子)의 문하에 들어갔다. 오기는 문하에서 인정을 받았으나, 재상이 되기 전까지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 모친의 부고를 받고도 가지 않았다. 결국 증자의 미움을 사 문하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장수가 되기 위해 병법을 공부했다.
몇 년 뒤 제(齊)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해오자 오기는 장수가 될 기회를 얻었으나, 오기의 부인이 적국인 제나라 출신인 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는 장수가 되기 위해 부인을 죽였고, 제나라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노나라 왕은 오기의 성품이 잔인하며, 오기가 위나라에서 큰 죄를 짓고 도망쳐오는 바람에 위나라와의 관계가 껄끄럽게 되었다는 이유를 들어서 그의 병권을 회수해버렸다. 그는 위나라의 문후(文侯)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위나라로 돌아갔다. 오기는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장군이 되었고, 뛰어난 지휘력과 용병술을 보여주며 수많은 공을 세웠다. 오기는 직위가 가장 낮은 병사들과 같이 먹고 자면서 노고를 함께 나누어 병사들의 신망을 얻었다. 어느 날 심한 종기로 괴로워하는 병사가 있었는데 오기가 직접 종기에 찬 고름을 빨아 주었다. 그러자 그 병사의 어머니가 통곡했다. 남편은 장군이 고름을 빨아 준 뒤로 전장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싸우다가 죽었는데, 이번에 장군이 아들의 고름을 빨아 주었으니 이제 아들이 언제 어디서 죽을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이유였다. 아버지는 내가 돈 봉투를 준 일은 그 부인의 마음을 훔친 거라고 단정했다. “김 과장 아내가 집에까지 찾아온 절박한 심사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이 고귀하다. 네 맘 편해지자고 돈 봉투를 건넨 거는 값싼 동정이다. 그 여인의 값을 매길 수 없는 마음을 흥정했다. 남의 마음은 얻는 것이지 훔치는 게 아니다”라고 다시 나무랐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나 돌아가신 아버지 장례식장에 김 과장은 김 사장이 되어 나타나 조문했다. 아버지 회사 직원 중에 문상 온 사람은 그분뿐이었다. 김 사장은 흐느끼며 “감원대상이 된 날은 무척 마음이 아팠는데 한참 지나서야 사장님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며 울었다.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원래 국어사전에 없었다. 흔히 ‘진정으로’라는 표현을 할 때 쓰이는 ‘진정’에서 파생된 단어로, ‘참되고 애틋한 정이나 마음’을 뜻하는 진정(眞情)이라는 어근에 -성이라는 접사가 붙은 파생어다. 진정성만이 다른 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살아가며 흠집나기 쉬운 게 진정성이다. 그 또한 손주들에게도 반드시 물려줘야 할 고결한 성품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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