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보는 영화번역가' 황석희 "아직도 100% 만족한 대사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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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집 <번역 : 황석희> 출간한 18년차 번역가2015년 4월 1일. 풋내기 영화 번역가 황석희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짧은 만우절 거짓말을 올렸다. "마블 영화를 내가 작업하게 됐다. 계약 꾹."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밥벌이를 위해 외화드라마 시리즈 '뉴스룸' 등 영상 번역을 한 지 8년, 영화 번역계에 진입한 지는 불과 2년쯤 됐을 때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던 소원은 1년이 채 되지 않아 실제로 이뤄졌다. 그에게 영화 '데드풀' 한국어 번역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이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데드풀은 주인공이 '구강액션'이라 할 만큼 욕설과 유행어를 넘나드는 화려한 대사를 구사한다. 황 번역가는 '말맛'을 살려낸 신선한 번역으로 호평 받았다. 영화는 청소년관람불가인데도 국내에서 330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았다.
2년 뒤 국내 개봉한 '데드풀2'도 당연히 황 번역가가 맡았다. 데드풀이 영어 욕설과 함께 "pumpkin(호박)"을 내뱉으면 "씨(호)박아!"라는 한국어 자막이 떴고,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데드풀' 성공 이후 황 번역가는 '믿고 보는 번역가'로 불리며 '스파이더맨' '아바타' 등 대작 번역을 맡았다. 심지어는 "'번역의 신'이 참여했다"며 영화 마케팅에 동원될 정도다.18년차 번역가인 그는 최근 출간한 자신의 에세이집 <번역 : 황석희>에서 '번역의 신'이라는 수식어구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어디 집 근처에 토굴이 있으면 큰 이불을 하나 들고 들어가서, 그 깊숙한 곳에 꼭꼭 숨어 이불킥을 삼천사백오십팔만 번쯤 하고 싶더라."
책 출간을 계기로 최근 고양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제 번역을 좋아해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제가 거품 같아 책 출간을 오래 망설였다"고 했다. "영화 '데드풀' 자막이 화제가 된 이후 출간 제의가 올 때마다 '그래도 사람이 마흔살은 넘어야 책을 쓰죠' 하며 다 거절했어요. 그런데 어느새 그 나이가 돼버려서 더 이상 거절할 말이 없더라고요.(웃음)"
그는 최근에는 영화를 넘어 연극, 뮤지컬, 그림책 등 '잡식성 번역가'로 활약하고 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여유롭고 화려한 프리랜서와는 거리가 멀다. 카페에서 일하기는커녕 27인치 모니터 두 개를 오가며 작업하느라 방밖으로 나오기도 힘들다. 그의 유니폼이자 전투복은 무릎 나온 추리닝이고, 쉴 때는 그 어떤 영어도 듣고 싶지 않아 철 지난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본다. 인터뷰 당일 새벽 4시까지 일하다 오후에 일어났다는 그는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조금 바뀌었지만, 여전히 올빼미 밤샘 작업으로 일상이 엉망진창"이라며 웃었다.'데드풀'과 더불어 황 번역가를 유명하게 만든 또 한 가지 키워드는 '사과'다. 영화 개봉 후에도 오역 지적이 합당하다고 느껴지면 이를 인정하고 공개 사과한다. 영화사 등을 설득해 DVD 자막을 수정한다. 책에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속 언어장애인을 '농아'로 칭했다가 '농아인'이라는 표현이 맞다는 지적을 듣고 이를 바로잡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흔치 않게 오역을 인정하고 수정하는 우직한 번역가'로 통한다. 황 번역가는 "그보다는 문제를 빠르게 수습하려는 약싹빠른 태도에 가깝다"고 손사래 쳤다.
"모든 번역가는 늘 최선의 표현을 고민해요. 그런데도 작업한 영화를 100번 보면 100번 전부 더 나은 표현이 떠올라요. 실수일 때도 있고, 언어는 끊임없이 살아서 움직이니까요. 저도 한때는 오역 지적을 들으면 끝까지 오기를 부리고 싸우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유순해지기도 했고(웃음) 사태를 수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자진납세라는 걸 알게 된 거죠."그는 처음으로 작업한 영화만큼이나 처음으로 오역을 수정한 영화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의 대사 중 'sweetbread(소의 흉선을 일컫는 요리용어)'를 '꿀빵'으로 번역한 것.
황 번역가는 "전문 셰프들에게 몇 달간 자문을 구하고 심지어 레시피까지 받아보면서 번역한 작품이었는데, 뒤늦게 실수를 알게 되니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며 "끙끙대다가 영화 커뮤니티에 사과 글을 올리고 영화사에 수정 요청을 했다"고 했다.
이런 경험이 있기에 '인공지능(AI)이 번역가란 직업을 없앨 것'이라는 흉흉한 예언은 그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황 번역가는 "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게 아니라 해석하는 일"이라며 "이미 번역가들은 AI를 활용해 더 나은 번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낯선 영어 구동사를 제대로 한국어로 옮기기 위해 AI에게 예문을 만들어보라고 시키거나, 영화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조사에 AI를 이용한다. "AI를 제대로 활용하는 번역가와 그렇지 않은 번역가 간 격차는 인터넷 시대 번역가와 그 이전 번역가 간 격차만큼 클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는 AI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이 번역한 영화 '크리에이터' 속 한 장면을 들려줬다. 이 영화는 몇 십년 뒤 'AI는 인간의 적'이라 믿는 세력들과 AI에 친화적인 세력 간 전쟁이 벌어진다는 내용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AI 번역기를 통해 소통하는데, 맥락없이 직역을 해 번역의 질이 형편없다. "AI가 일상이 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AI가 번역은 못 하다니 참 우습고도 의미심장한 장면이죠. 언어를 해석하고 옮긴다는 건 그토록 복잡미묘한 작업이에요."
"좋은 번역가가 되는 법은 뭔가요?" 강연때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가 "반드시 자신의 글을 써보라"고 답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다독, 다작, 다상량(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 기자 준비생 시절 들었던 '좋은 기자가 되는 법'을 그에게 그대로 들을 줄은 몰랐다.
황 번역가는 "번역 일을 하려면 외국어는 당연히 잘 해야 하는 것이고, 결국 번역가는 영화든 책이든 드라마든 인풋에 대한 내 해석을 정교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소셜미디어에 꾸준히 글을 쓰는 건 "세상을 번역하는" 자신의 일을 계속해서 잘하고 싶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내년 만우절에는 어떤 거짓말을 적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먼 훗날 손가락 관절염에 걸려 은퇴하는 날, '꾸준히, 계속해서 영화 번역 일을 해왔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답했다."저는 번역을 하면서 행복해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작업은 여전히 힘들고 괴로운데, 결과물에서는 오는 성취는 크죠. 번역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성취감이 가장 큰 일,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저는 앞으로도 번역가로 살 것이고, 계속해서 글을 쓸 것 같아요."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