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처럼 성장 멈춘 한국 출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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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 오상헌 문화부장
"그 숫자, 진짜 맞나요?"
몇번이나 되물었다. 머릿속으로 짐작했던 수치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설마 그 정도일까'란 의심은 스마트폰으로 관련 자료를 확인한 뒤에야 거둘 수 있었다.7만5324개. 작년 기준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출판사 수다. 2012년 4만2157개에서 매년 3000~4000개씩 더해졌으니, 지금 세어보면 8만개에 육박할 수도 있겠다. 많아도 너무 많다. 5조~6조원 시장에 이렇게 많은 '선수'가 뛰는 산업이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이중 상당수가 1년에 책 한권 내지 않은 1인 출판사라 해도 말이다. 출판시장이 쪼그라드는 걸 감안하면, 이 숫자를 이해할 길은 더 멀어진다. 지난해 상위 77개 출판사 매출은 5조1081억원으로, 10년전(2012년 5조6576억원)보다 10% 줄었다.
5조 시장에 7만 곳 격돌
국내 1위 단행본 출판사(참고서 제외)인 김영사의 2012년과 2022년 성적표에 이 모든 상황이 담겨 있다.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매출(약 350억원)은 똑같은데, 영업수지는 19억원 흑자에서 5억원 적자가 됐다. '업계 1등도 적자'란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출판분야 '챔피언'의 덩치가 우리 산업 전체로 보면 '플라이급' 밖에 안된다는 점이다. 인공지능(AI)이다 빅데이터다 세상은 팽팽 돌아가는데, 저 정도 기업규모로 미래를 잘 준비할 수 있을까. 덩치를 키우고 수익성을 끌어올려야 할텐데, 과문한 탓인지 의미 있는 인수합병(M&A)을 했거나 이렇다 할 신사업에 뛰어든 출판사는 들어보지 못했다. 굳이 리스크를 안고 도전했다가 큰 낭패를 보느니, 지금 살림이라도 유지하는게 낫다고 보는건 아닌지….누군가 "다양성을 추구하는 출판업계의 문법은 생산성을 중시하는 일반 기업과 다르다"는 말로 이 현상을 설명해줬다. 하지만 세계 최대 출판사인 펭귄랜덤하우스(PRH)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2013년 영국 펭귄북스와 독일 랜덤하우스의 합병으로 태어난 이 출판사의 매출은 '결혼' 첫해 26억유로(3조7000억원)에서 지난해 42억유로(6조원)로 61% 늘었다.
성장동력은 M&A와 신사업이다. 올 들어 미국 중견 출판사 소스북스 지분 8%를 인수해 지분율을 53%로 끌어올린데 이어 스페인 출판사 로카 에디토리얼도 사들였다. 미래 먹거리로 삼은 오디오북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플레이어웨이 프로덕츠도 매입했다. 그렇게 PRH는 출판을 넘어 콘텐츠 기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K문학'의 성립조건
PRH가 M&A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효율을 높이고 투자여력을 비축할 최선의 방법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해야 아마존 의존도를 낮춰 고객과 직접 소통을 늘릴 수 있고, 이게 정착되면 수익도 늘어난다는 게 PRH의 판단이다. 물론 해외라고 모든 출판사들이 덩치 키우기에 나서는 것도 아니고, 그게 꼭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미래를 움켜쥐기 위해 '야성'을 발휘하는 출판사는 꼭 있다.따지고 보면, 문화는 반도체 만큼이나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산업이다. '영어를 안써서 안된다' '변방이라 안된다'는 온갖 우려를 이겨내고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이 된 K팝과 K드라마가 이미 된다는 걸 보여줬다. 'K문학'이 그 바통을 못 이을 이유가 없다. 그러려면 혁신의 주체가 돼야 할 출판사들이 보다 강해져야 한다. 하이브와 CJ 없이 K팝과 K드라마 열풍이 있을 수 없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