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트' 김호영 "엔젤 은퇴하는 진짜 이유는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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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렌트' 김호영 인터뷰"연기를 하다 문득 '내가 너무 노련해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대, 방송에서 쌓은 내공이 제가 '렌트'에서 표현하고 싶은 엔젤의 풋풋함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멋있다'는 얘기 들으려고 은퇴 선언한 건 아닌데요. 주변에서 '더 할 수 있는데 왜'라고 생각할 때 내려오는 용기가 멋있긴 하네요."
전세계 최장수·최고령 '엔젤' 타이틀
"데뷔작이자 데뷔 역할…감회 남다르다"
"박수 받을 때 물러나는 것도 선배의 덕목"
"렌트 한국 협력 연출로 돌아오겠다"
뮤지컬 '렌트'에서 21년째 엔젤 역을 소화하고 있는 뮤지컬 배우 김호영은 작품과 배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이같이 말했다. 김호영은 이번 시즌을 끝으로 더 이상 엔젤을 맡지 않기로 했다. '렌트'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현대화한 작품으로,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모여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꿈과 열정, 사랑과 우정을 그린 뮤지컬이다. 1996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는데, 작품의 작가 조나단 라슨이 개막 하루 전날 요절해 관객들에게 더욱 극적으로 각인됐다. 한국에서는 2000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첫선을 보여 올해 아홉 번째 시즌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작품은 좌절과 실패의 파도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오직 오늘뿐'이라는 작품의 주제가 함축돼 있는 '노 데이 벗 투데이(No day but today)'와 1년을 분 단위로 환산해 52만5600분으로 표현하며 매 순간 사랑하자고 말하는 '시즌스 오브 러브(Seasons of love)'는 전 세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표 넘버다.
'렌트'에서 김호영은 21년째 드래그 캐릭터 '엔젤' 역할을 맡고 있다. 드래그 캐릭터는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과 반대되는 성별처럼 치장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극 중 엔젤은 거리의 드러머로, 천재 컴퓨터 과학자 '콜린'과 사랑에 빠지는 인물이다. 반짝이는 은색 하이힐을 신고 조명이 달린 초록색 치마를 입은 채 친구들에게 사랑과 열정, 희망을 전파한다. 엔젤은 극 중반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되는데, 사망한 뒤에도 친구들에게 사랑의 가치에 대해 영감을 주는 인물이다. 분량이 많진 않지만 삶과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렌트'에서 가장 강한 여운을 안기는 감초 같은 역할이다.
최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만난 김호영은 '렌트' 엔젤과 작별하는 이유에 대해 "역할이라는 게 배우의 실제 나이와 상관없는 것 맞다. 하지만 '렌트'의 엔젤은 작품에서 상징성이 있는 인물이다 보니 사랑스러움과 풋풋함, 젊은 에너지가 제대로 드러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21년 차 뮤지컬 배우로서 내가 갖게 된 에너지와 내공이 역할에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엔젤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좋은 배우들도 많지 않나. 선배로서 자리를 물러나는 것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피부와 관절은 아직 멀쩡하다. 신체 나이와는 상관없다"며 유쾌한 입담으로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사실 김호영은 이번 '렌트'의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바쁜 스케줄 탓에 고사했었다. 김호영은 "'렌트'는 어떤 작품보다도 앙상블, 상대 배우와의 호흡이 중요한 작품이다. 제작사는 내공이 있으니 일부 연습에 빠져도 된다고 했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못하겠다고 했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제작사의 간곡한 요청으로 출연을 결심하고 나서, 막상 연습하는 시기가 오니 시즌제로 진행되던 몇몇 예능 프로그램이 휴식기에 들어갔다"며 "결국 모든 연습에 빠짐없이 다 참여할 수 있었다. 튕긴 건 난데 되려 내가 연습 출석률이 제일 높았다. 결국 '렌트'를 할 운명이었던 거다"라며 웃었다.김호영과 '렌트'의 인연은 2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2년 동국대 연극영화학 2학년 시절 친구를 따라 '렌트' 배우 오디션에 갔다가 캐스팅된 것. 처음 맡은 배역도 엔젤이다. 김호영은 "'렌트' 오디션 직전,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뮤지컬 '유린타운'을 1열에서 관람했다. 오디션장에 가니 며칠 전 무대 위에 있던 이건명, 황현정, 성기윤과 같은 대배우들이 있더라. 팬심으로 오디션을 봤는데 1열에서 내가 너무 튀는 관객이었나보다. 오디션 합격 후 들어보니 나를 기억하고 계셨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선배들에게 사랑받았던 기억을 되살려, 이번 '렌트'에서 엔젤 역에 더블 캐스팅된 후배 조권에게도 '내리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김호영은 "(조권이) 최근 공연 도중 내 소장용 드럼스틱을 하나 해 드셨다. 말로는 '이거 내 건데!'라고 했지만 바로 새로 구매해서 줬다. 연습용 치마를 살 때면 '조권 엔젤'이 생각나기도 하고, 옷을 빠르게 갈아입는 노하우를 전수해주기도 했다"며 후배에 대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 "2002년의 나를 생각해보면, 조권은 기술적인 면에서 습득력이 빠른 친구다. 춤이나 노래에 대한 경험이 많아 일단 출발점이 다르다. 힐을 신고 퍼포먼스 하는 것에 익숙하고 여장에 필요한 손짓, 표정에도 거부감 없지 않나"라며 조권을 칭찬했다.
다만 "'렌트'가 대사를 제한하고 넘버 위주로 줄거리를 풀어가는 '송스루(Song Through) 뮤지컬'인만큼, 연기를 하려고 보면 단박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 부분을 조권에게 설명해주려 노력했다"고 전했다.2002년부터 지금까지 수백번의 공연에서 엔젤로 나선 김호영은 엔젤을 ''사랑'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했다.
김호영은 "작품이 초연된 1996년에 비하면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그때보다 '렌트'의 성소수자라는 소재에 대한 충격은 덜 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 아닌가. 누군가 뜨겁게 사랑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결국 모두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렇게 사랑하세요', '저런 사랑은 틀렸습니다'를 말하는 작품이 아니니 '오늘 하루를 아름답고 충실하게 살자'는 대전제 아래서 사랑을 해석하는 건 관객의 몫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김호영 엔젤'의 매력으로는 '좌중을 압도하는 흡인력'을 꼽았다. 김호영은 "관객이 박수치는 타이밍을 알아보는 감각은 솔직히 조금 타고난 것 같다. 엔젤의 대표 넘버 '투데이 포유(Today 4 U)'로 등장할 때 박수가 터져 나오면 짜릿하다. 타이밍을 머리로 계산하는 건 아니다. 이 감각이 나를 뮤지컬계에서 계속 버틸 수 있게 해준 재능이 아닌가 싶다"며 웃었다.
엔젤로 분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상대 배역 '콜린'과의 호흡이다. 김호영은 "'엔젤은 콜린과 함께 있어야 비로소 빛나는 인물'이라며 "데뷔부터 지금까지 '콜린과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잘 표현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연기에 임했다. 그렇다 보니 시즌마다 콜린 역을 맡은 배우와도 실제로 친해졌다"고 전했다.
현실의 자신에게도 '엔젤'과 '콜린'처럼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을 주고받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김호영은 어머니와 2002년 '렌트'를 통해 함께 데뷔한 뮤지컬 배우 정선아를 언급했다.
김호영은 "항상 '슈퍼스타'라고 말해주는 어머니는 두말할 것도 없고, 가족 다음으로는 정선아만큼 무조건적인 관계가 또 있을까 싶다. 항상 서로 칭찬해주고, 연기와 노래에 관해 진지한 이야기도 나누며 같이 성장했다"며 동료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냈다. "제작사도 아직 모르는 나만의 큰 그림이 있다", "요즘엔 '이 장면에서 어떻게 하면 나도 살고 저 배우도 같이 돋보일 수 있을까' 생각한다" 등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김호영과 '렌트'와의 연이 여기서 끝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김호영은 "앞으로 '렌트'의 연출 스태프로 참여하고 싶다. 다섯 시즌의 '렌트'를 경험해보니 이젠 배역이라는 나무를 넘어 양상블과의 호흡, 작품 전체의 구성 등 숲도 볼 수 있게 됐다. '렌트'는 데뷔작이라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다. 기회가 된다면 액팅 코치, 드라마투르기, 연출가 등 스태프로서 '렌트'와 계속 연을 이어가고 싶다"면서 작품에 대한 사랑을 보여줬다.
엔젤을 연기하면서 사람 김호영의 가치관 정립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김호영은 "내 별명 '호이(Hoy)'는 대학생 때 지은 건데, 공교롭게도 이 단어가 스페인어로 '오늘'이라는 의미더라. '호이'가 데뷔작 '렌트'에서 관객에게 '오늘의 소중함'을 표현한다. 마치 운명 같다. 내 현실 속 삶에서도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려고 노력한다"고 전했다.
'렌트'의 엔젤, '프리실라'의 아담 등 여장 남자 연기로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가 하면, '킹키부츠'의 찰리와 같은 도회적 남성 캐릭터도 훌륭히 소화한 김호영. 다양한 배역을 고루 맡아온 것에 대해서도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배우들은 보통 무대에서 한번 주연을 맡게 되면 쭉 주연급 역할로 커리어를 쌓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자신한테 어울리는 배역을 찾아 이미지를 굳히는 경우도 많고요. 그런데 전 커리어 안 따지고 다 했어요. 때로는 이런 제 행보가 '뮤지컬 배우로서 오히려 나의 입지를 애매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라는 고민도 해본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젠 그것 또한 저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스펙트럼의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거요. 지금도 하고 싶은 배역이 보이면 오디션에 직접 가서 역할을 따냅니다. 킹키부츠의 찰리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내년은 일단 엔젤로 시작하니까, 벌써 기운이 좋아요. 2024년에 보여드릴 김호영의 다채로운 모습도 기대해주세요."한편 '렌트'는 내년 2월 25일까지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공연한다.
김영리 한경닷컴 기자 smart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