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는 샤넬 넘버5와 똑같은 쌍둥이 향수가 있다

[arte] 책 리뷰


카를 슐뢰겔 지음
편영수 옮김
마르코폴로
240쪽 / 2만원
두개인 듯 하나다. 마치 향수병이 담긴 종이상자 같은 <제국의 향기> 책 표지에는 언뜻 보면 향수 한 병이 그려져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각기 다른 두 개의 향수 그림이 겹쳐져 있다.
주인공은 샤넬 넘버 5와 레드 모스크바. 1921년 5월 5일 프랑스 파리에서 출시된 샤넬 넘버 5는 마릴린 먼로 덕분에 너무도 유명해졌다. "잘 때 뭘 입냐고요? 물론 샤넬 넘버 5죠." 먼로의 말은 샤넬 넘버 5를 불후의 향수로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레드 모스크바는 소련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향수다.연결고리가 없어보이는 두 개의 향수는 사실 어머니가 같은 '쌍둥이'다. 독일 저널리스트이자 동유럽 역사 전문가인 저자는 1980년대 초반 소련의 행사장에서 맡았던 향기를 이후 프랑스에서 다시 맞닥뜨리면서 두 향수의 기원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책으로 풀어냈다. "향수에 관한 책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그는 향수와 20세기 정치사회사를 혼합해 독창적인 책을 솜씨 좋게 만들었다.

샤넬 넘버 5와 레드 모스크바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저자가 지목한 건 '부케 드 카타리나'다. 1913년 러시아 제국에서 프랑스 향수 회사 알퐁스 랄레의 수석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가 로마노프 왕조 수립 300주년을 기념해 만든 향수다. 러시아의 여황제 예카테리나 2세가 애용하던 향수를 개량해 만든 것으로, 이듬해 '랄레 넘버 1'이라는 이름으로 재출시했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의 혼란을 피해 보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샤넬의 연인이었던 러시아 황족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로마노프의 소개로 코코 샤넬을 만난다. 보가 건넨 10개의 향수 샘플 중 샤넬은 다섯 번째를 선택했고, 이 향수는 '샤넬 넘버 5'라는 이름으로 출시된다. 저자는 샤넬 넘버 5가 랄레 넘버 1과 마찬가지로 북극의 공기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 전통적인 꽃향기가 아니라 알데히드를 합성해 만들었다는 것 등을 그 근거로 든다.그런데 랄레 넘버 1의 제조법을 알고 있는 조향사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오귀스트 미셸. 러시아 사회의 혼란을 피해 고향인 프랑스로 돌아간 보와 달리 러시아에 남았던 미셸은 이후 국유화된 향수 회사에서 일하며 '레드 모스크바'를 만들어낸 것이다.

상반된 두 조향사의 운명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보여준다. 보는 프랑스 향수 산업의 유명 조향사로 살아가지만, 미셸은 대숙청이 횡행했던 스탈린 시대에 조용히 사라졌다. 정확히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 지조차 알 수 없다. 스파이라고 오해받기 쉬운 외국인 신분에다 사치품 생산의 종사자라 숙청당했을 지 모른다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두 조향사만큼 흥미진진한 대척점에 서 있는 게 두 여자다. 샤넬, 그리고 스탈린의 외무장관이었던 몰로토프의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 젬추지나는 레드 모스크바의 병에 크렘린궁 지붕을 담은 마개를 씌우도록 한 사람이라 전해지는데, 국가 향수 기업 연합의 우두머리를 맡으며 소련의 향수·화장품 산업 발달을 이끈 인물이다. 두 여자는 혹독하고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각기 프랑스와 소련을 무대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책은 향수 냄새가 퍼져나가듯 향수, 역사적 인물, 정치사회사로 이야기를 확장해나간다. 향수 회사들에게 향수 레시피는 1급 비밀이고, 두 향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의 추론일 뿐이지만 매혹적인 서사와 인물들에 저자의 주장을 따라읽게 된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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