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기' 해외로 눈 돌리는 K액셀러레이터…동남아 등에 거점 마련 [긱스]

생존전략 다시 짜는 액셀러레이터

시장 악화에 용역 등 '부업' 늘려
글로벌 액셀러레이팅 수주 경쟁
중동·유럽에까지 사무소 설립

상장 꾀하며 '현금흐름' 확보 주력
블루포인트, 대기업 오픈이노 집중
퓨처플레이, AC·VC 투트랙 전략
국내 액셀러레이터 업계가 생존 전략을 다시 짜고 있다. 액셀러레이터는 벤처투자 시장에서 극초기 창업 기업을 선별해 투자·보육하는 기업이다. 벤처 호황기에는 벤처캐피털(VC)이 진입하지 못하는 극초기 창업팀을 발굴해 초기(시드 및 프리 A) 투자를 맡는 데 주력했지만, 벤처투자 혹한기가 길어지면서 본업인 투자보다 글로벌 액셀러레이팅 용역이나 대기업 오픈이노베이션 등 ‘부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래픽=이은현 기자

주목받는 글로벌 액셀러레이팅

코로나19 팬데믹 종식으로 국내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 수요가 커지면서 글로벌 액셀러레이팅 사업은 액셀러레이터 업계의 새로운 돌파구가 되고 있다. 해외 사업을 추진하는 국내 스타트업의 현지 투자 유치, 법인 설립, 협력사 연결 등을 돕는 역할이다.

미국 액셀러레이터 플러그앤드플레이의 한국지사 설립을 도왔던 송명수 대표가 지난해 설립한 펜벤처스코리아는 처음부터 미국, 싱가포르 등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해외 진출을 돕는 사업모델로 시작했다. 펜벤처스는 신생임에도 와이앤아처와 함께 중소벤처기업부의 초격차 1000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에서 해외 투자유치 주관사에 선정됐다. 오픈AI와 협업할 국내 스타트업 선발 업무도 맡고 있다. 스파크랩은 애초에 글로벌을 지향해 설립됐다. 스파크랩그룹 내 미국, 대만, 중국, 호주 등의 거점 네트워크가 강점으로 꼽힌다. 최근엔 사우디아라비아에도 둥지를 틀었다.

빅뱅엔젤스는 ‘크로스보더’ 액셀러레이터를 지향한다. 싱가포르 VC 파쿠하르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국내 스타트업이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스라엘 스타트업 지원기관과도 손을 잡았다. 동남아는 액셀러레이터마다 주력 지역이 나뉘어 있을 정도다. 싱가포르는 빅뱅엔젤스 외에 어썸벤처스, 펜벤처스, N15파트너스 등 가장 많은 액셀러레이터가 동남아 거점으로 삼고 있으며, 베트남은 더인벤션랩이 탄탄하게 자리 잡았다. 와이앤아처는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사무소를 두고, 해외법인 설립 시 동반 출자하는 식으로 사업을 한다. 일본엔 대기업 계열 액셀러레이터인 롯데벤처스, 신한퓨처스랩이 활동 중이다.내년 상장을 목표로 준비 중인 씨엔티테크는 코로나19 이전까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중국, 몽골, 홍콩, 대만에 운영하던 7개 해외법인을 철수하고 현재는 현지 파트너와 공동 프로그램과 공동 펀드를 운용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내년 초 미국 파트너사와 공동 펀드 결성을 시작으로, 중국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공동 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늘어나는 해외 지원 사업

이처럼 글로벌 액셀러레이팅이 부상한 데는 정부 및 공공기관의 해외 지원사업이 증가한 이유가 크다. 5개 부처 협업을 통해 창업진흥원이 시행하는 ‘글로벌 액셀러레이팅’ 지원 사업 예산은 2019년 28억원에서 올해 99억원으로 세 배가량 늘었다.

그동안 해외 기업이 주도하던 글로벌 액셀러레이팅 분야에서 ‘K액셀러레이터’의 존재감도 커지고 있다. 더인벤션랩(베트남), N15파트너스(싱가포르), 어썸벤처스(싱가포르), 123팩토리(독일), 벌트코리아(미국)는 올해 글로벌 액셀러레이팅 지원 사업에 공동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하고 있다.이호재 와이앤아처 대표는 “해외 유명 액셀러레이터가 정부 지원 사업으로 국내에 진출해 있지만 한국식 ‘밀착 보육’은 기대하기 힘들다”며 “국내 액셀러레이터들도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도울 수 있는 역량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상장 위한 수익 창출에 주력

코스닥시장 상장을 준비하는 액셀러레이터들은 원활한 현금흐름을 창출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투자한 회사의 평가이익을 액셀러레이터의 영업수익으로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는 시장 분위기 속에서 용역 매출이나 자체 사업 매출을 키우는 전략이다.

올해 3월 액셀러레이터 1호 상장에 도전했다가 철회한 블루포인트파트너스가 집중하는 건 대기업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이다. 한솔그룹과 함께한 ‘한솔 브이 프론티어스’와 GS그룹과 손잡은 ‘더 지에스 챌린지’다. 이를 통해 총 44개 스타트업을 발굴했고, 회사의 신규 수익원으로 자리 잡았다. 올해는 LG전자의 사내벤처 프로그램을 공동 기획하고 한국관광공사와 지방 소멸을 막기 위한 스타트업 발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지난해 상장을 준비했다가 한파를 피해 잠시 후퇴한 퓨처플레이는 최근 VC 자격을 추가로 획득했다. 초기 투자를 넘어 스타트업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투자에 참여하는 ‘이중 라이선스’ 전략을 펼치기로 했다. 투자보다 보육에 초점을 맞춰 온 와이앤아처는 광고회사 두 곳의 인수를 진행하고 있다. 초기 스타트업 대상 광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체 수익원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다. 삼성증권을 주관사로 선정하고 2026년까지 상장 완료한다는 목표다.

450개 난립…옥석 가리기 필요

액셀러레이터 업계가 갖가지 ‘부업’을 통해 행동반경을 넓히는 가운데 건강한 성장을 위해선 옥석 가리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액셀러레이터로 불리는 창업기획자 등록 제도가 2017년 도입된 이후 지난 9월 기준 452곳이 활동 중이다. 지난해까지 1조3091억원을 누적 투자했다.

하지만 급증한 숫자만큼이나 양극화는 심하다. 투자 실적도 없이 정부 보조금을 따내기 위해 간판만 내건 경우가 허다하다. 김진영 더인벤션랩 대표는 “초기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해 투자하고 사업화 모델을 구축하는 제대로 된 액셀러레이터 기능을 하면서 규모 있는 개인투자조합(엔젤펀드)을 결성하는 곳은 20곳 정도에 불과하다”며 “액셀러레이터 업계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옥석 가리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란/김종우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