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악한 양들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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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發 '구국의 소리' 듣던 주사파1966년생 한 남성 배우가 이런 얘길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출세작이 터지기 전까지, 나이를 두 살 높게 속였다고 한다. 한국 남자들 사이에서는 한 살 차이도 관계서열을 규정한다. 하지만 그가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았고 양심의 가책도 적잖았다. 결심한 그는 며칠에 걸쳐 절친인 배우들을 찾아다니며 그 사실을 털어놓은 뒤에야 간신히 ‘거짓말의 노예’에서 해방됐다. 그 진땀 빼는 과정을 술회하는 말미에 그가 남긴 말이 인상 깊다. “거짓말의 가장 큰 피해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자신입니다.”
주체사상 공부하며 운동권 잠식
'군자산의 약속'으로 의회 진입도
'민주화 영웅' 행세 피해자는 국민
늑대보다 사악한 양들의 거짓말
놔두면 아이들도 노예로 만들 것
이응준 시인·소설가
지하조직 통일혁명당은 1968년에 적발됐다.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는 김일성주의자들로서, ‘신영복’도 주요 일원들 중 하나였는데, 일망타진돼 사형당하거나 수감됐다. 한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통혁당’이 자신들은 서울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있다며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것이다. 1985년 7월 통혁당은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아나운서가 서울말을 구사하는 ‘구국의 소리’ 방송을 계속했다. ‘혁명’은 전염되는 달콤한 정신병이다. 1986년에 이르면 서울대 운동권 대다수가 청계천 전파상으로 단파 라디오를 사러 갔고, 한민전 방송 녹취본이 학생회실에 굴러다녔다. ‘구국의 소리’ ‘평양방송’ ‘김일성종합대 방송통신 강좌’ 등으로 주체사상을 공부하고 투쟁지침을 마련했다. 남한 운동권은 한민전에 홀릭(holic)된 주사파에 ‘거의 전부’ 잠식됐다. 또한 남한 ‘자생’ 주사파 지하조직들은 한민전을 통해 북한 노동당과 직·간접적 연계를 갖고 활동했다.여기서, 반전이 있다. 한민전과 한민전 방송은 서울에 없었다. ‘구국의 소리’의 발신지는 황해도 해주 남산(동경 125도 4분 17초, 북위 38도 1분 17초)이었다. 물론 나중에 이 기만을 운동권도 알게 됐지만, 그때는 이미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독된 거짓은 그 거짓을 둘러싼 진실들을 사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시위에서 한민전은 일본의 전공투(全共鬪)처럼 극단 폭력으로 치닫는 남한 운동권을 ‘대중적으로’ 전환시켰다. 화염병 대신 박수와 손뼉을 치게 했고 ‘대통령직선제’라는 모토로 선량한 가면을 씌워준 것도 한민전, 곧 북한이었다. 1987년 그해 여름의 진실은 <1987> 같은 순진한(?)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어떤 ‘문화’는 조작된 역사보다 위험한 유행이다.
2001년 9월 22일 충청북도 괴산군 군자산에 위치한 보람수련원으로 여러 주사파 조직들에서 선별된 700여 명이 집합해 23일까지 ‘민족민주전선 일꾼전진대회’를 개최한다. 이게 일명 ‘군자산의 약속’이다. 이들은 ‘6·15남북공동선언’을 발단으로 몇 년 내 우선 낮은 단계의 연방제 남북통일이 실현되고 10년 전후로는 ‘자주적’ 민주정부와 ‘완전한’ 연방제 남북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 투쟁하기로 결의한다. 방법의 핵심은, ‘민주노동당에 가입해 당권을 장악한 뒤 주사파들이 대한민국 의회로 진입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남한 주사파를 대중화시킨 것과 궤를 같이하는 북한의 지도(指導)였다. 이후 벌어질 일들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위 두 가지 사례는 저 바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비밀이 아니다. 다만, 대중화되지 못한 진실은 뻔뻔한 거짓 앞에 무기력하다. 나이 두 살 올려 친 것도 누구에게는 괴로움이라는데, 자신들을 ‘민주화 영웅’이라고 사기 치는 자들에게는 아무 고통도 없나 보다.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선거용 자서전에는 ‘한민전 방송’ ‘군자산의 약속’, 그리고 그 비슷한 것들만 쏙 지워져 있다. 저 배우의 거짓말에 대한 잠언이 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의 거짓말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들 자신이 아니라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거짓말은 땅 위의 큰 물고기와 같다. 펄떡거리며 법석을 떨지만, 그대를 해치지 못한다. 그대는 가만히 있기만 하라. 그것은 저절로 죽어버린다.” 시인 조지 크래브의 이 말도 이제 나는 믿지 않는다. 거짓은 ‘노력해서’ 밝히지 않으면 날이 갈수록 거대하고 막강해져 우리를 해친다. 양(羊)의 탈을 쓴 늑대가 아니라, 양과 구분이 불가능한, 늑대보다도 사악한 양이 돼 버린다. 그냥 놔두면 아이들까지 노예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군부독재처럼 종식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