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게임계 메시' 페이커의 멘털훈련과 닮은 이 발레동작

발레의 열두 달

다리 높게 들어 올리는 '데벨로페'

이 동작에서 중요한 건 높이 아닌 '버티기'
독서로 마음근육 키운 페이커 습관과 비슷
인생은 마라톤이란 교훈과도 맞닿아 있어
‘데벨로페’는 무릎을 똑바로 폈는지, 방향과 각도가 정확한지, 골반과 허리는 옆으로 빠지지 않았는지가 중요하다. 아무리 다리를 높이 들어도 몸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더는 데벨로페라고 볼 수 없다.
얼마 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처음으로 e스포츠 대회의 거리 응원전이 열렸다. 매년 수억 명의 관중을 동원하며 일명 ‘롤드컵’이라고도 불리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롤)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을 초대형 전광판으로 중계한 것이다. 그 덕분일까.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한국 대표로 출전한 e스포츠팀 T1은 7년 만에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랐고, 팀의 ‘간판스타’ 페이커(이상혁) 역시 또 한 번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페이커가 롤게임에서 최고의 선수로 군림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비운다고 페이커 스스로 밝히는 것을 보면 독서가 10년째 꾸준히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준 게 아닐까 싶다. 현재 페이커가 읽은 책 목록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될 정도로 화제이기도 하다.페이커 뉴스를 듣고 발레의 데벨로페(dvelopp) 동작을 떠올렸다. 차근차근 몸의 기초공사를 완성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동작이기 때문이다. 데벨로페는 ‘발전된, 확장된, 펼쳐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양다리를 턴아웃한 상태에서 한 다리를 축으로 세우고, 다른 다리는 무릎을 굽혀 발끝으로 축으로 세운 다리의 복숭아뼈, 종아리, 무릎을 순차적으로 지나다가 마지막 순간 움직이던 다리의 무릎을 펴면서 높이 드는 동작이다.

그 순간, 들어 올린 다리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높이로 확장되게 하기 때문에 이 동작에 데벨로페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 다리는 세우고, 다른 다리를 든 상태에서 완벽하게 몸의 균형을 이뤄야 하는 동작이다. 그때 움직이는 다리를 앞으로 뻗으면 데벨로페 드방(dvelopp devant), 뒤로 뻗으면 데벨로페 데리에르(dvelopp derrire), 옆으로 들면 데벨로페 알라스공드(dvelopp la second)라고 부른다. 흔히 데벨로페라고 하면 데벨로페 알라스공드를 의미한다.

발레가 갖고 있는 기술적 요소와 몸의 가용 범위는 다른 어떤 춤보다 강하고 넓다 보니 발레를 보거나 배우기 시작할 때 다리를 얼마나 ‘찢는지’, 얼마나 높이 드는 데 곡예적인 요소에 대해 주안을 두고 이야기하는 경우를 종종 마주친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발레의 데벨로페는 들고 있는 다리의 높이보다 다리를 든 상태로 버티고 견디는 게 더 중요하다.움직이는 다리의 무릎을 똑바로 폈는가. 허벅지 안쪽 근육과 코어를 단단하게 잡고 오랫동안 버티면서 서 있을 수 있는가. 앞이나 뒤, 옆의 방향과 각도가 정확한가. 골반과 허리는 옆으로 빠지지 않고 잘 지탱하고 있는가. 아무리 다리를 높이 들어도 이런 부분들이 깨진다면 그건 데벨로페가 아니다. 정상을 찍는 것보다 정상에 도달했을 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평상시 바른 자세를 습득하고 끊임없이 체크하며 근육을 단단하게 키우는 힘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발레가 아니라 삶으로 치환해서 바라본다면 마음의 방향과 자세를 바로 세우고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호두까기 인형의 인도춤
때마침 우리나라는 12월이면 발레 ‘호두까기 인형’으로 연말을 장식한다. 볼쇼이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에서는 데벨로페가 주요하게 쓰이는 부분이 있는데 2막 ‘과자들의 나라’ 디베르티스망 중 인도 춤 장면이다. 여러 민족의 춤을 보여주는 이 디베르티스망 장면에서 인도 춤은 느린 선율에 맞춰 조용하게 수행하듯이 추는 춤사위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열정적인 에너지나 유쾌함이 묻어나는 다른 디베르티스망 춤과 달리 처음에는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호두까기 인형’을 봐온 관객 중에는 정확성과 근육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이 춤을 특별히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또 하나 대표적인 사례는 ‘라바야데르’ 3막 ‘망령들의 왕국’에 등장하는 쉐이즈 군무다. 32명의 여성 무용수가 선보이는 이 군무는 배신당하고 죽은 연인을 떠올리는 전사 솔로르의 환영 속에서 펼쳐지는 장면이다. 쉐이즈들이 한 명씩 아라베스크 하며 천천히 언덕을 내려오는 장면, 데벨로페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부분은 이 작품의 백미다. 오랜 세월 발레로 훈련한 근육, 정확한 각도와 방향, 이 모든 것을 32명의 무용수가 함께 선보이기 때문이다.한 해의 끝 12월. 진정으로 중요한 기초공사나 내실은 뒤로 하고 다리의 높이에만 연연한 점은 없었는지 돌아본다. 데벨로페는 축이 돼 서 있는 다리의 선을 따라 다른 다리가 움직이는 과정이 중요하고, 정점의 높이를 찍는 그 순간보다 거기서 버티고 견디는 힘과 근육이 중요한 동작이다. 인생에서는 종종 속도보다 방향, 높이보다 지구력과 지속력이 중요한 경우가 많다는 걸 데벨로페를 통해 깨닫게 된다.

이단비 발레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