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재무제표만 본다고? 인적자본 공시가 온다 [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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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감독원 전자공시(DART)에서 회사의 재무제표만이 아니라 인적자본 공시를 포함한 ESG 공시를 볼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한국은 공시 의무화 시점을 늦추긴 했지만, 미국 등 선진국이 이미 공시 의무화를 위한 법제화를 시작했기 때문인데요. ESG 공시에서도 인적자본 공시 의무화가 어디만큼 와 있을까요. 추가영 레몬베이스 콘텐츠 리드가 한경 긱스(Geeks)를 통해 전합니다.“2024년 중반까지 미국 모든 상장기업에 대한 상세한 인적자본 공시 기준이 마련될 것으로 예상합니다."미국 인적자원(HR) 전문기업 HCMI 제프 히긴스 대표는 지난달 2일 열린 글로벌인재 포럼에 참가해 ‘글로벌 뉴트렌드, 인적자본 공시와 ISO-30414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란 주제의 세션에서 이같이 말했다. 같은 세션에 연사로 나선 슌스케 호사카 일본 HCPro 대표 역시 일본 금융청이 올 초부터 유가증권 보고서에 인적자본에 대한 정보를 기재할 것을 의무화했다고 전했다. 지난 10월 한국 금융위원회는 인적자본 공시를 포함한 ESG 공시 의무화를 당초 계획이었던 2025년에서 2026년 이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해 그 시차가 더 크게 느껴졌다.
기업가치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요건
한국 정부는 공시 의무화를 준비할 시간을 더 두는 결정을 했더라도, 인적자본 공시의 ‘글로벌 스탠다드'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에 대해 시선을 거두어선 안 될 것이다. 인적자본(human capital)의 사전적 의미는 ‘교육이나 직업훈련 등으로 그 경제가치나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자본'이다. 정의 자체에 교육·직업훈련 등 사람에 대한 투자를 포함하고 있고, 또 이런 투자를 통해 경제가치나 생산력이 높아진다고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인적자본 공시를 통해 ‘회사가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투자하고 있는지'에 대한 보다 정량적인 데이터를 회사의 내외부 이해관계자들이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투자자들이 직원 수 외 더 많은 인적자본 정보를 공개하도록 기업에 요구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업가치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S&P500 기업의 가치에서 무형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90%에 달한다. 혁신, 경제적 성공의 원천이 토지, 건물 등 유형자산에서 집단 지식, 기술, 경험을 토대로 생산된 지식재산권, 브랜드 등 무형자산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어떤 건물 안에서 일하고 있는지'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 개발에 회사가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는 의미다.
또 잠재적인 지원자는 회사가 인재 개발 및 육성에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지를 근거로, 자신의 경력 성장 기회가 많을 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내부 채용률이나 승진까지의 시간, 회사의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기술 및 역량의 수, 프로그램 참여율 등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적자본의 정량화·표준화 흐름
인적자본 공시 범위 2020년 8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상장사를 대상으로 인적자본 공시를 의무화했지만, 어떤 항목을 어떤 지표로 공시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지침은 아직 없다. 다만 2018년 국제표준화기구(ISO)가 발표한 ‘ISO 30414(조직의 내·외부 이해관계자를 위한 인적자본 보고 가이드)’에서 제시한 11개 핵심 영역의 58개 지표에 따라 공시하는 기업이 느는 추세다.
SEC의 인적자본 공시 의무화 이후 기업의 과거, 다른 기업과의 비교가 가능하도록 정량화·표준화 요구가 더 강해지고 있다. 게리 겐슬러 SEC 의장은 "기업이 인적자본 및 회사와 구성원 간 상호작용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며 "이직률, 기술 개발 및 교육, 보상, 복리후생, 다양성·건강·안전 등에 대한 인구통계학적 분석 결과 등의 지표가 공시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9월에 발표된 SEC 산하 투자자 자문위원회(IAC) 권장 사항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IAC는 노동 비용, 보상(임금, 복리후생, 주식 보상 등 구분), 직원 수(정규직, 시간제, 임시직 등 구분), 이직률, 인구통계학적 데이터 등의 양적 데이터를 공개할 것을 권고했다.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로펌 '깁슨, 던 앤드 크러처'에 따르면, S&P100 기업들이 실제 공시한 내용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언급된 항목은 인재 개발, 다양성과 포용성, 인재 채용 및 유지, 직원 보상 및 복리후생 등이다.
정량적인 수치를 공개하는 비율도 늘고 있다. 예컨대 이직률을 공개하는 비율이 2022, 2023년 두 해에 걸쳐 전체의 20%를 기록해 2021년(17%) 대비 늘었고, 인재 개발과 관련해 교육에 든 시간 및 비용 등 수치를 공개한 기업은 2023년 14%로 전년(11%) 대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문화 및 구성원 몰입과 관련하여 서베이 빈도수를 공개한 비율은 2023년 64%로 2021년 52%, 2022년 60%에 이어 매년 꾸준히 늘고 있다.
HR의 역할 변화
인적자본 공시가 확대되면서 인사(HR)의 역할이 비즈니스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인적자본의 정량화를 통해 어느 항목에 얼마나 투자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 수립에 HR의 참여가 용이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더 나아가 인적자본과 재무적 성과 간 상관관계를 밝히는 데까지 HR이 기여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실제로 투자자책임연구센터(IRRCI)는 하버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과의 공동 메타 분석을 통해 인적자본 관리가 재무 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밝힌 67개 관련 연구를 찾았다. 고도화된 인재 분석을 거치는 기업이 경쟁사보다 높은 주가를 유지하거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딜로이트와 CEB(현 가트너)의 연구 결과도 있다.
추가영 | 레몬베이스 콘텐츠 리드(Content & Communications Lead)
일하는 사람들이 성과를 내고 성장하는 방식을 혁신하는 스타트업 레몬베이스에서 쌓은 지식을 콘텐츠에 담아 널리 알리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레몬베이스에 합류하기 전엔 한국경제신문에서 기자로 일하며 창업 정책, 혁신 기업을 일군 기업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으며 넷플릭스의 ‘자유와 책임의 문화’를 담은 『파워풀』을 번역했다. 이후 혁신을 이끄는 사람과 문화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