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예술가들의 마지막 병원 [성문 밖 첫 동네, 충정로 이야기]
입력
수정
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서울적십자병원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신뢰할 수 있는 병원입니다.' 서울 적십자병원 홈페이지에 적힌 문구이다.
25, 적십자병원-1
병원이 국민들에게 늘 신뢰를 주지는 못했다. 1957년 출간된 박경리의 '불신시대'는 자식을 잃은 지영(박경리 자신)이 병원과 사찰에 대해 실망해 쓴 자전적 소설이다. 스님은 시주받은 공양미를 마을 사람들에게 되팔아 이익을 챙긴다. 쌀을 더 가져가려는 주민들과 흥정하면서 연신 "이래서 중이 살갔수?"를 외친다. 병원에서는 주사기의 함량을 속이고 환자를 건성으로 돌본다. 넘어져 뇌수술을 받아야 하는 아들의 엑스레이 한 장 찍지 않고 마취도 없이 수술대에 올린다. 지영은 허망하게 아들 문수를 잃는다. 부도덕한 사찰의 행태는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다. 결국 지영은 절에서 아들의 위패를 들고 나와 불을 질러 버린다. 어디를 가도 신뢰할 수 없는 불신의 시대다. 박경리가 소설에서 말한 불신시대는 가장 깨끗하고 신뢰해야 할 병원에 대한 실망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인가. 가난한 예술가들이 마지막으로 이 병원을 택했다. 50년대, 60년대, 그들은 이곳에서 쓸쓸하고 허망하게 죽어갔다. 쓸쓸하게 죽어간 화가 이중섭, 허망하게 죽어간 시인 김수영이 그랬다.

김수영은 1921년생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41년 선린상업학교 야간을 졸업하고 일본의 도쿄 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학업을 포기하고 연극에 몰두한다. 시를 쓰게 된 것은 해방 이후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 서울이 수복되니 오히려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어쨌든 인민군복을 입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된다. 아침마다 화장실에 가면 이념에 희생이 된 사람들의 시체가 똥물에 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자신들이 이념 때문에 포로가 되었으면서도 전쟁터의 살기와 증오로 서로를 죽이고자 했다. 김수영의 시가 진실성, 사회성을 지향하게 된 것은 이런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진저리가 났기 때문이다.
4.19 이후에 그의 시는 더욱 사회 참여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는 1968년 펜클럽의 문학 강연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고 외쳤다. 시인은 단지 가슴을 울리는 서정성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고 했다. 부조리한 사회에 침을 뱉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일갈했다. 시인의 통매(痛罵, 심한 꾸짖음)다. 비민주적인 사회에 대해 매서운 회초리를 든 모습이다.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청진동 곱창집에서 신구문화사 편집장이자 시인 신동문, 소설가 이병주, 한국일보 문화부 정달영 기자와 술을 마셨다. 소주 몇순배에 취기가 올랐다. 이때 성격 까칠한 김수영은 이병주의 지적 자만이 넘쳐 흐르는 이야기가 거슬려 시비를 걸었다. 신동문은 돌아가고 무교동 술집 ‘발렌틴’에서 맥주를 마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볼보 승용차로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이병주의 호의를 거절했다. 을지로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마포를 거쳐 서강까지 종점에 내린 것은 밤 11시 30분, 버스 두 대가 엇갈리며 달려가다 한대가 인도로 뛰어들면서 김수영의 뒤통수를 들이받았다. (최하림, 김수영평전, 374~375p) 그의 집이 있는 마포 구수동은 닭을 750마리나 기를 정도로 인적이 드문 한적한 농촌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다. 시인은 밤을 밝히려 했으나 시대를 가로지르는 광란의 버스가 그들 덮쳤다. 아내 김현경은 남편이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서울 적십자 병원으로 갔으나 이미 산소 호흡기를 낀 상태였다. 6월 16일 8시 의사가 산소호흡기를 벗겼다. 불과 사흘 전 김수영, 그의 누이 김수명과 술을 마셨던 홍사중의 말이다. “어느 장소든 삶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삶의 끝, 죽음의 한 치 앞까지 몰리고서도 기적적으로 생환해 왔던 김수영도 그 장소가 주는 삶의 아이러니를 피해 가지 못했다.”
국가불행시인행(國家不幸詩人幸)이라는 중국의 고사가 있다. 국가가 불행할 때 시인은 그 속에서 시의 영감과 소재를 찾아 최대의 창작 혼을 발휘한다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를 모국어로 살아왔던 학병세대, 좌우의 이념 대립, 6.25전쟁, 인민군시절, 포로, 4.19혁명, 5.16정변 등등 나열하기조차 버거운 시대 상황을 온몸으로 견뎌냈다. 어디 김수영만 그러했겠는가.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모두 험난한 시대를 살아왔다. 험난한 시대를 거칠게 살아왔던 김수영,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시를 만들었다. 그의 눈은 크고 검고 깊다. 눈이 큰 사람은 겁이 많다고 하는데 그는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을까? 그가 거칠어진 이유는 그의 강도 높은 순수 때문이다. 그 순수성은 거친 세상과 불화할 수 밖에 없었다. 겁 많은 눈으로 바라다 보이는 세상의 부조리에 그는 침묵할 수 없었다. 그의 시가 시대를 저항하는 아이콘으로 승화되었다. 국가가 불행한 시대에 살아 시인으로 문명을 얻었을지 모르지만 그가 감내해야 할 세상은 너무도 험난했다. 그는 시대를 밝히려 했으나 어두운 밤, 질주하는 시대의 버스는 그를 피해가지 못했다.
그의 유작이 그 유명한 '풀'이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후략)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